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의 한 쇼핑몰 광장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영향력이 큰 기업일수록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과감하고 단호하게 법을 집행하는 정부를 만들겠다”고 강조했다. 대기업의 출자총액제한제 부활과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을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이 같은 분위기는 민주통합당도 마찬가지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는 9일 “경제민주화와 재벌 개혁에 당의 명운을 걸겠다”며 ‘순환출자 금지’ ‘출자총액제한제 부활’ ‘금산분리 강화’ 등 경제민주화 관련 9개 법안을 당론으로 확정해 발의했다.
#대기업 정책도 정치권 논리로
여야의 대기업 정책에 대해 기업들은 강력 반발하고 있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서 표심을 얻기 위해 대기업을 희생시키고 있다는 것. 이 같은 기업들의 주장은 출총제의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출총제는 1986년 처음 도입 이후 정권 교체기와 선거 때마다 여덟 차례나 모습을 바꿔가며 폐지와 부활을 거듭했다. 대기업으로 쏠린 경제력 집중을 완화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졌지만 기업의 투자 의욕과 고용창출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논란을 야기했다.
실제 전두환 정부가 1986년 출총제를 도입했을 때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었다. 정권 존립이 위태롭다고 느끼던 차에 1980년대 초 이른바 ‘3저 호황(저물가-저금리-저환율)’을 업고 급성장을 거듭하던 대기업 집단에 칼 끝을 겨눔으로써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측면이 강했다. 당시 계열사 출자 한도는 40%였지만, 1994년 25%로 강화됐다. 출총제는 1998년 본격화한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줄도산 사태에 내몰리자 폐지됐다. 당시 정부는 기업들의 방만 경영을 경제위기 주범으로 지적했고 이에 따라 부실 대기업에 구조조정의 칼날을 들이댔다. 출총제 폐지는 이 같은 채찍 대신에 주어진 당근이었다. 출총제는 1999년 다시 도입됐지만 2007년 출자한도 완화에 이어 2009년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쏟아지는 규제 법안 기업들은 순환출자 규제가 더 큰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민주당과 새누리당 모두 순환출자 규제를 주장하고 있다. 두 당의 핵심적인 차이는 ‘이미 순환출자로 기업 지배구조가 형성돼 있는 국내 대기업 그룹에 순환출자 금지를 새로 적용할 것인지 여부’다. 민주당은 신규 순환출자 금지뿐만 아니라 대기업들이 갖고 있는 기존 순환출자 지분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 새누리당은 ‘이미 순환출자가 이뤄진 대기업들은 그냥 놔두자’는 입장이다. 다만 새로 출자할 때는 상호출자 규제를 엄격히 적용하자는 것이다.
신규로 이뤄지는 순환출자만 금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재 상호출자만 규제하고 있는 공정거래법 조문에 ‘순환출자 규제’ 조문을 새로 넣으면 된다. 문제는 민주당의 주장이 관철돼 ‘대기업들의 기존 순환출자분’마저 해소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면 대기업들은 지분을 강제로 매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기업 그룹 지배구조가 일부 해체되는 길을 선택하거나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얘기다. 대기업들이 한꺼번에 계열사를 매각하면 기업 매물 충격을 불러올 공산이 크다. 대기업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큰 돈을 들여 기업을 사들일 주체가 없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글로벌 기업 사냥꾼들의 인수·합병(M&A) 먹잇감이 될 가능성이 높다. 투자 위축을 불러올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공정위 칼날에 초긴장
한편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 1일 상호출자제한집단 63개 그룹의 주식 소유 현황과 지분도를 공개했다. 이 소유 지분도는 복잡하고 방대한 출자구조를 입체적으로 그려냈을 뿐, 그 자체로 특별히 새로울 것은 없다. 하지만 공정위가 63개 그룹 소속 전 계열사를 대상으로 향후 채무구조와 내부거래 등 민감한 기업정보들을 추가로 조사해 공개하겠다고 밝히고 있어 재계의 긴장감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특히 기업 관계자들은 공정위의 이 같은 조사가 최근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일고 있는 ‘경제민주화’ 구호와 결합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서민층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 ‘재벌개혁=경제민주화’라는 등식을 선거전략으로 활용하는 상황에서 대기업 집단의 온갖 정보들이 여과없이 그대로 노출될 경우 국민들의 반기업 정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정위가 겨냥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같은 여론의 흐름이다. 공정위는 출자총액제한제나 순환출자 등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기업 지배구조 규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런 사전적 규제로는 실효성을 거둘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공연히 논란만 야기할 뿐이라는 판단에서다. 공정위는 대신 일련의 조사와 발표를 통해 대기업들에 대한 압박을 가한 뒤 기업들이 스스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서도록 하겠다는 심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