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무제한의 고속도로 ‘아우토반’은 오랫동안 독일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아우토반은 엄청난 매력을 지닌 단어였다. 동시에 나치가 어떻게 한때나마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히틀러가 나쁜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우토반을 건설했어”라는 말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현대 독일 안팎에서도 “히틀러가 아우토반을 건설해 경제 대공황을 극복했다”는 식의 표현을 접할 수 있다. “총통께서 길에다 실업을 묻어버렸다”는 나치의 선전 문구는 나치가 패망한 뒤에도 오랫동안 상식처럼 여겨져왔다.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은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대규모 재정이 투입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의 대표적 사례였다. 정부의 강력한 투자 프로그램에 따른 경기 부양이라는 케인스식 불황 대처법이 행동으로 옮긴 사례로 꼽혀왔다. 하지만 아우토반을 둘러싼 이 같은 이미지들은 대부분 허구의 신화에 기초한 점이 적지 않았다. 아우토반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부터 히틀러나 나치 정권이 생각해낸 것이 아니었다. 바이마르공화국 정부의 책상 서랍 속에 있던 고속도로 건설 구상을 가져다 쓴 것에 불과했다.
독일에서 순수하게 자동차 전용도로로 가장 먼저 구상되고 건설된 것은 1913년 완공돼 1921년 확장된 베를린의 자동차 교통 및 연습 도로였다. 현대적 의미에서 최초의 실질적인 자동차 전용도로가 계획되고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나치 집권 1년 전인 1932년이었다. 이를 주도했던 인물도 나치즘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일 서독 초대 총리가 되는 콘라트 아데나워 당시 쾰른 시장이 아우토반의 첫 삽을 떴다. 최초의 아우토반은 쾰른과 본을 오가는 20km 길이의 4차선 도로였다.
하지만 1933년 집권한 나치 정권은 이를 자신들의 업적으로 가로채버렸다. 나치의 경제 이데올로그이던 고트프리트 페더가 도로의 중요성을 파악해 “제국 고속도로의 건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도로 건설 작업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히틀러가 낸 아이디어로 포장했다. 나치는 아우토반을 ‘히틀러 도로’ ‘총통의 길’로 부르고 히틀러가 실업을 없앴다는 선전전을 폈다.
나치의 손아귀에 들어선 아우토반 건설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상징적으로 히틀러가 첫 삽을 뜨고 연설을 한 뒤, 노동자들이 진군하며 흙을 퍼 나르는 식의 세리머니가 연출됐다. 1934년 독일 22개 지역에서 고속도로 건설이 시작됐다. 1932년 말에서 1933년 초 사이 수km에 지나지 않던 아우토반의 총연장은 1935~1936년이 되면서 108km로 대폭 늘어났다. 그리고 1937년에는 1087km, 1938년에는 3046km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계획됐던 6900km 구간 중 3800km 구간이 완성됐다. 1938년 시점에 나치 지도부는 아우토반의 총연장을 1만km까지 늘릴 계획을 수립했다.
나치는 아우토반 건설에 총 65억 라이히스마르크의 재정을 투입했다. 처음에는 도로이용세를 거둬 재원을 마련하려고 했지만, 1936년부터는 차량 보유자들에게 유류세를 올리는 식으로 세원을 넓혔다. 제국철도와 국영은행들이 자금을 대출해줬다. 그렇지만 재원의 60%를 차지했던 것은 나치 정권의 노동 관련 기구였다. 아우토반이 연결하는 도시로는 나치 이데올로기 확산을 상징하는 도시들이 우선순위였다. 바이에른주에서는 나치의 기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뉘른베르크, 뮌헨, 잘츠부르크 등을 연결하는 구간이 최우선시됐다. 뮌헨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는 1939년에 완공됐다.
아우토반은 군사적으로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독일의 저명한 현대사학자 볼프강 벤츠에 따르면 1938년 당시 총연장 3800km에 불과하던 아우토반의 군사적 유용성은 한계가 있었으며, 실제 군대와 군수품의 운송에는 철도가 주로 이용됐다. 무엇보다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대규모 건설 사업에도 불구하고 아우토반이 독일의 실업문제 해결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13만 명가량의 인력이 아우토반 건설에 참여했지만, 1932년 당시 600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있었던 만큼 아우토반 건설이 실업자 규모를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1933년이 되면 이런저런 정책으로 실업자 규모가 480만 명으로, 1935년에 270만 명으로 감소한다. 실업의 급격한 감소는 희망이 없던 사회를 순식간에 자신감이 넘치는 사회로 바꿨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당시 실업문제 해소의 결정적 요인은 아우토반 건설이라기보다 독일의 재무장 조치 효과가 컸다. 고용 증대를 위한 편법도 동원됐다. 통계상 성과를 높이기 위해 기계 사용을 억제하기도 했다. 1933~1934년 건설과 관개 사업은 원칙적으로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이뤄져야 했다.
눈에 보이는 실업은 크게 줄었지만 내실은 통계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1936년 모든 식품의 일인당 소비는 여전히 1929년 수준을 크게 밑돌았다. 1934년 중반까지 새로 취업했다는 350만 명 중 40만 명가량은 농촌 활동으로 용돈을 타는 수준의 청년들이었다. 60만 명은 실업 보조금에 불과한 액수를 임금으로 받으며 건설이나 관개 같은 중노동에 투입된 취로사업 노동자에 불과했다. 재정 투입과 대규모 사회사업을 통한 실업문제는 실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과제였던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