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는 미국 경제사에서 풍요로운 번성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당시 미국 공업 생산은 약 90% 증가했다. 소비자의 구매력이 향상되면서 자동차와 가전제품 같은 내구 소비재 소비가 늘었다. 인구는 꾸준히 늘어나는 반면 물가는 안정됐다. 주식시장은 활황을 보여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는 별칭이 붙었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산업 생산 중심지였던 시카고는 경제 활황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었다. 철강, 육류 가공, 기성복 제조, 농산물 거래가 활발했다. 농산물 가공품과 가구, 전화기 관련 장비, 철도 부품, 철강 제품을 시카고는 미국 내 어느 곳보다 많이 생산했다. 당시 시카고 노동자들에게는 특별한 자격이 요구되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장시간의 험한 일을 해낼 체력과 의지만이 중요했다.
US스틸, 스위프트, 인터내셔널하베스터를 비롯한 대규모 제조공장이 밀집한 시카고는 미국에서 노동운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한 지역으로 유명했다. 1919년 당시 시카고에서 일하는 40만 명의 노동자 중 70% 이상이 종업원 수가 100명이 넘는 작업장에서 일했다. 3분의 1가량은 종업원 수 1000명 이상인 ‘대기업’에서 일했다. 하지만 독일,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 리투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서 이민 온 백인과 유대인, 흑인 등 여러 인종의 노동자 간 교류와 의사소통은 수월치 않았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부유해졌을지 몰라도 사회 하층부의 개별 노동자까지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난 사례는 많지 않았다. 실업의 위기는 상존하는 위협이었고, 가족 구성원의 질병이나 예기치 않은 죽음은 흔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에서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의 불황을 비롯해 주기적으로 불황기가 도래했다. 이 시기 실업은 일상적인 삶의 한 부분이었다.
하지만 1929년 글로벌 경제에 충격파를 가한 경제 대공황에 비하면 이전 시기의 고난은 고난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였다. 생계에 타격을 가한 범위부터 달랐다. 계획했던 결혼이 늦춰지고 생계를 위해 거리 노점상이라도 해야 했던 정도의 고난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재난이 닥친 것이다. 대공황기 연구로 명성을 날린 리자베스 코언 미 하버드대 교수에 따르면 시카고 지역에선 대공황의 마수를 피한 노동자 가정은 거의 없었다.
노동자들은 일자리가 아예 없어지는 것보다 작업시간과 수당이 줄어드는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1927년 시카고 지역 제조업에 종사하던 사람의 절반만이 1933년에도 제조업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기간에 일자리를 지킨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은 5분이 1 수준으로 대폭 삭감됐다.
1920년대까지는 가장이 실직하더라도 다른 가족 구성원이 일자리를 구해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다. 가족을 먹여 살릴 ‘대타’를 가족 중에서 구하지 못하면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혹은 인종별 커뮤니티에 잠시 생계를 의탁하는 것도 가능했다. 각 노동자의 출신 지역과 인종에 맞춰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던 종교기관도 구휼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에 이민 온 인종별로 만든 ‘민족 은행’들도 약소민족에게 일종의 대부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경제 대공황은 이 같은 생존 네트워크를 무력화할 만큼 광범위한 실직과 임금 저하 현상을 동반했다. 그 파괴력이 너무나 대단해 구시대의 상조 네트워크를 완전히 붕괴시켰다. 종교기관은 구휼할 ‘돈’이 없었고, ‘민족 은행’들은 파산했다. 대공황이 지난 뒤에도 옛 구휼 네트워크는 거의 복구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