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 보잉-록히드마틴 1903년 12월17일 오전 10시35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의 키티호크 해안.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던 오빌과 윌버 라이트 형제는 ‘하늘을 날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현실로 만들었다. 이들이 만든 ‘라이트 플라이어호’는 첫 비행에서 12초 동안 36m를 나는 데 성공했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 성공 이후 항공기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수백명을 실은 제트 여객기가 5대양 6대주를 수없이 넘나들고 있다. 전투기는 1944년 독일에서 제트엔진을 첫 장착한 ‘1세대’ 메서슈미트Me262 개발에 이어 초음속 비행 능력을 갖춘 2세대, 고성능 다목적 레이더와중거리 공대공 미사일을 갖춘 3세대, 중거리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4세대, 스텔스(은폐) 기능을 갖춘 5세대로 발전해갔다.
세계 항공기산업 발전을 주도한 회사는 보잉과 록히드마틴이다. ‘인류의 첫 비행’에 매료된 사람들이 항공기 제작에 뛰어들었다. 좌절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항공산업과 미국 군수산업의 두 축을 만들어냈다.
●1916년 탄생한 두 회사 보잉의 전신은 1916년 7월 윌리엄 보잉이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 세운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다. 보잉은 독일인 출신 미국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시애틀에서 목재회사를 인수해 큰 돈을 벌었다.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성공한 보잉은 1909년 미국에서 열린 첫 에어쇼에서 ‘하늘을 나는 물건’을 본 이후 생에 전환기를 맞는다.
보잉은 당시 국제적 명성을 누리고 있던 라이트 형제를 찾아가 비행기를 타보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낙담하지 않고 매사추세츠공대(MIT) 졸업생 등 인재를 영입해 비행기 동체와 날개를 직접 만들었다. 당시에는 활주로로 사용할 만한 포장도로가 없어 시애틀 인근의 호수를 활주로 대용으로 사용하고 바퀴 대신 수중 이착륙용 플로트를 부착해 호수 위에서 시험비행을 거듭했다.
록히드마틴의 뿌리는 앨런 록히드와 맬컴 록히드 형제다. 이들은 글라이더 비행 장면을 본 뒤 항공기에 사로잡혀 정비사 일을 시작으로 비행법을 배웠다. 앨런은 1912년 동생 맬컴과 함께 4000달러를 빌려 알코하이드로항공기 회사를 세웠다. 1913년 첫 비행기인 G모델을 만들었지만 돈을 버는 데 실패하고 비행기마저 채권자들에게 빼앗겼다.
2년간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긁어모은 돈으로 비행기를 되찾은 형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에 참가했다. 투자자들을 모으는 데 성공한 형제는 보잉의 전신인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가 세워진 해인 1916년 록히드항공기제조회사를 만들었다.
●전쟁과 궤를 같이한 성장 두 회사는 전쟁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성장과 발전을 거듭했다. 보잉은 태평양항공기제작회사를 설립한 지 1년 뒤인 1917년 회사명을 자신의 이름을 딴 보잉에어라인으로 바꿨다. 설립 초기 주문이 전혀 들어오지 않아 사재로 연명하던 이 회사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본격 참여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전투용 항공기가 필요했던 미국 정부는 당시 보잉사가 ‘모델C’로 불린 수상비행기를 개발한 사실을 알고 50대를 주문했다. 이 주문 한 건으로 28명에 불과하던 보잉의 직원 수는 1년 만에 377명으로 급증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주문이 끊겼다. 수상보트와 침대까지 제작하며 버티던 이 회사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다시 바빠졌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국에서 1만2731대의 전투용 항공기가 만들어졌는데, 이 가운데 6981대를 보잉이 제작했다. ‘하늘의 요새’ 시리즈인 B17, B19, B29 전략폭격기를 이 기간에 생산했다.
록히드항공기제조회사는 1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 해군과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접촉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몇 년 후에는 회사 문을 닫기에 이른다. 앨런은 1926년 캘리포니아 할리우드에 록히드항공기회사를 설립하고 재기를 꿈꿨으나 1929년 디트로이트 항공사에 매각해야 했다. 세계 경제 공황으로 디트로이트 항공사 역시 망했다. 로버트 그로스 등이 1932년 록히드항공사를 사들여 1934년 록히드사로 개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