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시퀘스터(정부예산 자동삭감)’가 발동됐다. 정부 예산 중 국방비 427억달러를 포함한 850억달러(약 90조원)를 강제로 삭감하는 조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민주·공화당의 지도부와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미국은 연방정부의 재정적자가 막대한 나라. 공화당은 정부지출을 줄이는 등 정부의 허리띠를 졸라 이를 해결하자고 주장하고, 민주당은 같은 문제의 해법으로 세금우대조치 중지와 세금 인상 등을 내세우고 있다.
#개혁시도와 기존질서의 대립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은 지난 1일 백악관에서 재정적자 감축안을 놓고 막판 협상을 벌였지만 결렬됐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출 축소 외에도 부유층과 기업들에 세금을 더 거둬 재정적자를 메워야 한다는 종전 주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공화당은 복지 예산을 대폭 줄여야 하고 세금 인상은 경제와 일자리를 죽이는 일이라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텼다.
시퀘스터는 미국이 ‘쌍둥이 적자(재정적자와 무역적자)’로 고생하던 시절인 1985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재정적자가 다음 회계연도에서 허용한 최대 규모를 초과할 것 같으면 예산 집행 중에라도 정부지출이 자동으로 삭감되는 조치다. 다시 말해 미국 정부가 거둔 돈에 비해 너무 많이 쓰면 못 쓰게 막아버리는 것이다.
이번 논란을 자세히 뜯어보면 금융자본주의를 놓고 벌어지는 개혁 시도와 기존 질서의 대립이 들어 있다. 오바마는 월가를 ‘탐욕에 눈먼 살찐 고양이’라고 비판해왔다. 시퀘스터 협상에서 그는 성과보수 소득 등의 세금우대조치 철회와 조정을 요구하고 있다. 사모펀드 매니저, 헤지·벌처펀드 운용자, 부동산 투자펀드 파트너 등 1% 부자들이 타깃이다. 자본이득세와 배당소득세 세율은 근로소득세율보다 훨씬 낮기 때문에 이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 입장에선 성격이 다른 근로소득세와 자본소득세의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자본은 이득을 낳고, 이득은 투자로 이어져 일자리를 만드는 돈의 매커니즘으로 봤을 때 자본소득세율을 올리면 투자가 줄어들어 국가 경제 전반이 위축된다는 주장이다. 고쳐야할 것은 다시 돈을 낳는 자본이득세가 아니라 비효율적인 복지 예산이라는 것이다.
#민주·공화, 서로 다른 속내왜 민주·공화 양당은 시퀘스터가 발동할 때까지 협상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양보하지 않았을까. 시퀘스터가 오바마의 ‘위험한 도박’이란 분석이 있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가 타협대신 강공을 선택한 것은 공화당을 헐뜯어 내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하려는 전략”이라고 보도했다. 예산 삭감으로 공항 기능이 부실해지고, 의료보험 서비스에 차질을 빚고 공공시설이 문들 닫을 때마다 공화당에 비난이 쏟아질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지구온난화, 총기 규제 등 지금으로서는 돌파하기 어려운 정책들을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오바마로서는 시퀘스터를 택한 것으로 잃을 게 없다는 입장이다.
공화당 쪽에서는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 공화당 입장에선 “시퀘스터를 감당하지 못하는 정부라면 바꿔야 할 정도로 무능한 게 아니냐”고 몰아붙일 수 있다. 게다가 미국에서 중간선거는 경제가 좋을 때조차 거의 예외없이 집권당이 패배하는 결과를 보였다. 시퀘스터가 발동해 올해 미국의 경제성장률은 0.5%포인트 정도 감소하는 효과를 초래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 공화당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마지막 이슈가 정부지출 삭감과 감세를 통한 ‘작은 정부’론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민법 개혁은 물론 동성애자 결혼 등 사회적 가치와 관련된 이슈를 놓고 공화당 내 균열이 확연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수 공화당 출신 주지사들은 주민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다며 건강보험 개혁안(오바마 케어) 실행안에 잇따라 사인하고 있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이런 점에서 시퀘스터는 공화당이 진보 쪽으로 기울고 있는 미 정치의 축을 정지시키거나 최소한 느리게 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시금석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방정부 폐쇄상황 몰릴 수도
지금처럼 대결 양상이 지속돼 27일 이전에 예산안을 의결하지 않으면 연방정부 폐쇄 상황에 내몰린다. 197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17차례 연방정부가 문을 닫는 일이 발생했다. 정부가 폐쇄되면 모든 공무원은 출근조차 할 수 없다. 1995년 빌 클린턴 정부 시절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이 이끄는 공화당은 21일간 연방정부를 폐쇄한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