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서남권 지역에 800조원을 투자해 반도체 생산공장을 새로 짓는 것을 포함해 총 4755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달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반도체, 피지컬 인공지능(AI), AI 데이터센터 분야 투자 계획을 공개한 것이다. 이에 대해 반도체 투자가 호남에 편중됐다는 지적과 함께 기업 투자에 정부가 과도하게 개입했다는 관치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는 서남해안의 입지적 강점을 고려한 '기업의 자율적이고 합리적인 결단'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야당인 국민의힘은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사실상 기업의 투자 결정을 강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정부가 기업의 투자와 관련해 가이드를 하는 것이 적절한지 찬반 의견을 알아본다.
[찬성] 전략산업은 국가 총력전…정부 주도 산업정책 필요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글로벌 AI·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 간 총력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은 반도체과학법을 통해 자국 기업뿐 아니라 삼성전자와 TSMC에까지 보조금을 지원하며 자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반도체가 국가경쟁력과 안보의 핵심 요소가 된 만큼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일본은 정부 주도로 라피더스라는 반도체 파운드리 업체를 설립해 수조 엔을 쏟아붓고 있다. 중국은 반도체 육성펀드인 국가반도체대기금을 조성해 첨단 공정 투자를 국가 전략 차원에서 설계하고 있다. 국가가 전략산업의 인프라를 설계하고 속도를 조율하는 것은 반도체 패권 경쟁의 핵심 흐름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의 자율적 투자 결정에만 맡겨둬야 한다거나 관치라고 비판하는 것은 21세기 반도체 산업의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정부는 손을 떼고 기업 자율에 맡기라’는 주장은 순진하다 못해 위험하기까지 하다. 정부의 정교한 가이드라인과 개입은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장기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적 조치가 될 수 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 역시 정부의 강력한 가이드가 한강의 기적을 견인한 성공적 선례라고 할 수 있다.
반도체 공장 하나를 짓기 위해서는 기업의 자본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 대규모 전력과 용수, 배후 주거·교육·의료 인프라 등은 정부의 지원 없이는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이다. 기업 투자가 잘 이뤄지도록 병목을 뚫어주는 것도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다. 이런 조정 기능마저 부정한다면 국가는 전략산업 앞에서 아무 역할도 할 수 없다는 뜻이 된다.
한국 경제는 글로벌 경제질서의 급격한 재편 속 불확실성에 직면해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이 국가 차원의 전폭적 지원을 앞세워 생산 시설과 연구개발 투자에 속도를 내고 있는데 홀로 시장 원리만을 앞세워 정부 역할을 축소한다면 산업 경쟁에서 뒤처지고 말 것이다.
[반대] 투자는 기업의 자율 판단 영역…정부는 지원자 역할 머물러야
기업의 투자는 본질적으로 비용과 수익, 그리고 리스크에 대한 냉정한 계산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정치 논리나 관료 판단이 아닌 시장 논리에 따라야 효율적 투자가 가능하다. 그리고 투자 결정의 주체는 기업이어야 한다. 정부의 역할은 투자가 원활히 이뤄지도록 돕는 지원자에 머물러야 한다.
기업가는 생생한 현장에서 기회를 포착하고 혁신을 이끌어내는 핵심 주체다. 정부가 기업보다 글로벌 트렌드와 기술적 유망성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기업보다 앞서 시장을 예측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통해 기업의 투자 결정에 개입하는 설계자 역할을 자처할 경우 시장을 왜곡하고 자원의 비효율적 배분을 유발하는 ‘정부 실패’로 귀결될 우려가 있다.
특히 정부의 인위적인 투자 유도는 시장의 자율 조절 기능을 방해하고 특정 산업으로의 편중을 초래할 수 있다. 중국의 태양광 및 전기차 과잉 생산이 대표적 사례다. 중국 정부는 보조금을 지원하며 민간 자본을 해당 분야로 무리하게 유도했다. 그 결과 양적 성장은 이뤘지만 시장 수요를 초과하는 중복·과잉 투자가 발생해 결국 수많은 한계 기업의 부도로 이어졌다.
정부가 투자 지역과 규모, 시점까지 사실상 조율하는 방식이 관행으로 굳어질까 우려스럽다. 차기 정부에서 다른 지역, 다른 산업을 대상으로 이 같은 논리가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는 한국 기업의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들의 신뢰를 흔들리게 만들 수 있다.
정부의 역할은 특정 투자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용수·전력망 등 인프라를 구축하고 규제 완화 등 제도적 뒷받침을 해주는 데 그쳐야 한다. 구체적인 투자 결정은 시장 수요와 자체 타당성 분석을 바탕으로 기업이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한다.
√ 생각하기 - '개입이냐 아니냐' 이분법 넘어 협력 패러다임 필요
AI·반도체 패권 경쟁이 국가총력전으로 치달으면서, 정부와 기업의 ‘원팀’ 협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정부가 가이드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이분법적 논리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어느 수준까지 협력적 거버넌스를 구축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는 정부가 직접 지정하고 육성했다면, 이제는 위험 분산을 위한 ‘플랫폼형 지원’이 필요하다. 투자 위험이 큰 첨단 산업의 경우 민간 기업의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정부가 마중물 역할을 하는 기초 자본을 투입하고 제도적 불확실성을 제거해 주는 공동 투자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역할은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정부는 방향을 제시하고, 세부적인 결정은 기업이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