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
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
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조씨가 엄연히 살아 있어 예법상 나라의 큰 어른으로 존재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의대비가 상복을 입어야 하는데 얼핏 생각하면 3년상을 치르며 그 기간에 상복을 입고 있으면 될 것 같지만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효종이 바로 인조의 둘째 아들, 즉 차자였기 때문입니다.
인조의 둘째 아들인 효종을 바라보는 두 시각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효종을 적장자가 아니라 서자로 봤습니다. 물론 여기서 서자는 단지 첩의 자식만이 아니라 적장자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죠. 당연히 소현세자가 적장자이며 이미 그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을 때 장례식에서 3년 상복을 입었으므로 둘째 아들인 효종에 대해 사대부 가문의 예법과 동일하게 1년 동안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윤휴 등 남인 세력은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었더라도 인조의 뒤를 이은 조선의 국왕이므로 일반 사대부의 예법을 따를 수 없으며 따라서 3년 상복의 예를 갖춰야 한다고 반박하고 나섰습니다. 서인과 남인 모두 유교 경전 의례(儀禮)에 근거를 둔 주장이었는데 첨예하게 대립하자 경국대전에 따라 적장자 여부를 따지지 않고 1년 상복을 입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러나 곧 남인인 허목이 3년 상복 문제를 다시 제기하고 윤선도가 서인이 효종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정치적 공세를 취하면서 오히려 더 정치적 논쟁거리로 커지게 됩니다. 윤선도는 서인 세력의 탄핵을 받아 곧 유배지로 끌려가게 될 정도였습니다. 그는 81세가 되어서야 유배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1차 예송논쟁입니다. 현상적으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이죠.
예송논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1674년 효종의 비였던 인선왕후 장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번에도 자의대비의 상복 기간을 놓고 논쟁이 다시 벌어집니다. 서인은 여전히 효종 비를 왕후로 보기보다 둘째 아들의 부인, 즉 인조의 작은 며느리이므로 그에 맞는 9개월 상복 설을 주장합니다. 남인은 이에 반발하며 왕실과 사대부의 예법이 다른데, 이를 동일시하는 서인을 공격하며 왕비의 예를 갖춰 1년 상복설을 주장합니다.
조선 성리학 발전인가 정치적 싸움일 뿐인가
2차 예송논쟁은 지방 유학자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쳐 조선의 지배층 대부분이 관심을 가지고 여론을 형성하는 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과는 현종이 남인의 주장에 손을 들어줘 1년 상복설이 받아들여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