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三患 없애고 근대화 씨앗 뿌려
⊙ 대동법은 시대적 요구였다 조선정부 재정수입의 하나인 공물은 농민의 생산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한 과세였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부과되는 과세량에 무리가 있었다.
처음에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 개념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주요 세원(稅源)으로 자리 잡았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공물의 종류와 수량은 국가에서 소요되는 것을 기준으로 책정하기 때문에 천재(天災)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그 양이 감면되기 어려웠다.
더욱이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토산물까지 부과하여 백성들은 현물을 외지(外地)에 가서 사오는 부담까지 함께 지게 되었다.
이러한 제도의 허점을 틈타서 상인·관원이 백성 대신 공물을 대납해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이(利)를 붙여 착취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직접 공납하려 하여도 정경유착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방납업자와 악덕 관원이 결탁하여 관청에서 물품을 수납할 때 그 규격을 검사하면서 불합격품은 이를 되돌려 다시 바치게 하는 점퇴(點退)가 행하여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백성들은 점퇴의 위협 때문에 이후의 막대한 손실을 무릅쓰고서라도 방납업자들에게 대납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한 군현·마을 안에서 대토지를 가진 양반 지주와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 가난한 소작농이 같은 액수를 부담하거나 가난한 소작농들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공물의 과중한 부담과 방납의 폐단 등이 겹쳐서 농민층의 이탈이 증가하였다.
그리고 전쟁 후 정부가 재정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수입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공물 부담이 늘어나면서 그 징수의 기반마저 붕괴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납폐단의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家戶)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데,그것이 바로 대동법의 핵심 내용이다.
이렇게 바꾸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세금을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소작농은 면제되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폐해를 조정하여 농민의 이탈을 방지하는 한편,국가 재정수입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대동법의 시행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였다.
⊙ 김육(金堉)! 대동법이 불가하면 나를 벌하라 김육은 효종 때 우의정에 임명된 것을 대동법을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상소를 올렸다.
"신으로 하여금 나와서 회의하게 하더라도 말할 바는 이에 불과하니,말이 혹 쓰이게 되면 백성들의 다행이요,만일 채택할 것이 없다면 다만 한 노망한 사람이 일을 잘못 헤아린 것이니,그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고 성사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였으니,신이 믿는 바는 오직 전하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