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tariff)란 국내로 수입되는 물품에 대해 정부가 부과하는 조세를 말한다. 해외로 수출되거나 자국의 국경을 통과하는 물품에 대해서도 관세를 부과할 수 있지만, 이러한 형태의 관세가 시행되고 있는 경우는 현재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관세라 함은 수입품에 부과되는 수입관세를 의미한다.
정부가 관세를 부과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정부의 재정 확충을 위해서다. 관세는 수입품의 가격이나 수량에 따라 부과되는데, 어떠한 기준에 의하든 징수된 관세는 세금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수입으로 귀속된다. 따라서 관세가 부과되면 그만큼 정부의 수입도 증가하게 된다. 두 번째는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수입품에 관세가 부과되면 그 금액만큼 수입품의 가격이 상승한다. 이때 대체재 관계에 있는 국산품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지고, 이로 인해 수입량이 줄고 국산품 소비량이 증가하게 된다. 즉, 관세가 부과되면 국내 생산자의 시장점유율이 상승하여 국내산업을 보호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세
이와 같이 관세는 관세를 부과하는 정부와 해당국가의 생산자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또한 관세이기도 하다. 한편에서는 관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측도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관세가 정부에 의해 무역이 규제되는 보호무역의 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관세는 종종 경제주체 또는 국가 간의 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사진)’이다. 18세기 중반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치열한 영토전쟁이 한창이었다. ‘7년 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으로도 불리는 양국 간의 다툼은 1763년 파리조약이 체결되면서 영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영국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프랑스 통치 하에 있던 캐나다와 인도의 영토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모든 전쟁이 그러하듯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승전국 영국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랜 전쟁과 식민영토의 확대로 영국의 정부부채가 1억 4000만 파운드에 이르렀던 것이다.
파산 직전까지 내몰린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은 식민지 미국을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프랑스로부터 얻은 새 영토로의 미국인들의 진출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발표하는 한편, 재정수입을 늘리고자 조세제도를 개편하였다. 설탕법(Sugar Acts), 군대숙영법(Quartering Act), 인지세법(Stamp Act) 등이 당시 신설된 세금 관련 조례였는데, 특히 인지세법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1765년 제정된 인지세법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정부와 공공기관 등이 발행하는 공적문서는 물론 신문, 광고지, 달력, 예금통장 등 거의 모든 인쇄물에 인지를 붙이도록 강제하는 제도였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처음 도입된 인지세법은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 본토에서도 실시되고 있던 당시 보편화된 제도였다. 또한 영국의 인지세율이 미국보다 현저히 높았다는 점에서 식민지 미국에만 불평등하게 적용된 과세제도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무엇 때문에 인지세법을 극렬히 반대했던 것일까?
인지세법에 반발한 미국 인지세법이 시행되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계층은 대부분 상인이나 출판업자와 같은 부유층이었다. 이들은 인지세법이 미국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영국의회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정되고 강제된 제도이기 때문에 미국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부당한 조치라고 반발하였다. 심지어 “대표 없는 과세는 부당하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는 원칙하에 영국국왕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즉, 미국대표가 영국의회에 참석하지 않았으므로 미국 내의 인지세법을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영국에 의해 받아드려지지 않았다.
영국의회의 의원들은 대영제국 전체를 대표하는 자들이므로 그들이 정한 법과 제도는 식민지 미국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인지세법을 둘러싸고 극명한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영국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미국에서 전개되었다. 또한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중심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자유의 아들들(The sons of liberty)’이라는 급진단체도 결성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영국정부는 1766년 시행된 지 채 1년 밖에 되지 않은 인지세법을 전격적으로 폐지하기에 이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