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
1992년의 러시아와 2008년의 러시아는 너무 달랐다.
1992년,처음 러시아에 도착했을 때 "도대체 어떤 체제가 사람들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도로변에는 낡은 차들이 먼지를 가득 덮어쓴 채 뒹굴고 있었다.
빵을 사기 위해서 2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음식을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는 노인들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지하철 주변에는 집에 있는 온갖 것들을 가지고 나와 이를 팔아서라도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과 공포가 뒤덮여 있었다.
러시아인 특유의 무뚝뚝함은 여전하지만 이제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행동에는 여유가 배어 있다.
16년 전 차가 없어 텅 비었던 모스크바 도로에는 이제 서울을 방불케 하는 교통체증이 발생하고 있다.
시내 외곽에는 많은 수의 대형 마켓이 생겨 전자제품,의류,식료품,고가품 등을 팔고 있다.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던 '소비재 부족의 경제'가 이제는 물건은 많은데 돈이 모자라는 '화폐 부족의 경제'로 바뀌었다.
아니 지금의 러시아는 돈도 많은 경제이다.
고유가 덕분에 외환보유액은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유가가 배럴당 27달러 이상이 되면 그 차액의 80%를 세금으로 거두고 안정화 기금으로 적립한다.
외환보유액과 이 안정화 기금을 합치면 규모가 700조원에 이르러 일본 외환보유액의 70% 수준에 달하며 한국 외환보유액의 3배에 약간 못 미친다.
파이낸셜 타임스(FT)가 분류한 세계 500대 기업에 한국 기업은 5개가 포함된 반면 러시아 기업은 13개가 들어 있다.
2008년도 1분기의 경제성장률도 6.5%에 달해 칼날 끝에 서 있는 세계 경제 위기설을 무색하게 하고 있다.
러시아의 성취 이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도 하다.
빈부격차가 극심해 아직도 러시아인의 13%가 월수입 150달러 이하의 빈곤층인 반면 포브스가 2008년 확인한 1125명의 세계 부호 중 러시아인은 87명으로서 독일(59명)과 일본(24명)을 합친 수보다 많다.
러시아의 고질적인 문제인 부패는 여전하다.
모스크바에서는 하루 숙박료가 200달러를 밑도는 호텔을 찾기 어렵다.
아마 호텔 건립과 유지를 위해 부패한 관리에게 뿌려야 하는 많은 돈이 포함돼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젊은이들은 '성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자본주의를 좋아한다.
사실 세계에는 나쁜 자본주의도 있지만 좋은 자본주의도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