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한 왕권 부활시켜 부국강병의 기틀 다져
⊙ 국정운영의 주체는 왕이다
조선의 네 번째 군주인 세종이 처음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이유는 태종대에 이룩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현명한 재상을 등용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조화된 이상적 정치를 펼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왕권이 강력했고,세종 자신의 뛰어난 정치력이 있었기 때문에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문종과 단종의 불안한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6조 직계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실시된 의정부 서사제는 6조가 올린 사안 중에서 의정부의 1차 심사를 거친 사안들,즉 삼정승에 의해 1차적으로 검증을 받은 사안만을 왕에게 올리게 되는 제도다.
이에 따라 왕의 업무량은 감소했지만,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세력은 그만큼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세조에 의해 다시 부활된 6조 직계제란 6조의 판서(장관)가 왕에게 직접 업무보고 및 명령을 시달받는 제도다.
이 경우 의정부의 기능은 국가 주요사를 논의해 왕에게 '건의'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6조는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였고,이러한 6조의 업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왕에 의해 통제받으므로,의정부의 관료세력이 실무행정에 끼어들 여지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권의 입지는 현저히 약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세조는 국가의 대소사에 관한 결정을 의정부 중심의 관료세력이 아닌 왕이 주체가 되는 6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 강화를 실현했다.
결국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이른바 패륜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접적인 이유도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이 이른바 '황표정치'라 하여 나이 어린 단종을 왕으로 옹립해 놓고 나라의 정사를 신권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황표정치란 신하를 뽑을 때 세 정승이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사람을 뽑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임금은 황표에 적힌 대로 승인만 해주는 형식적 위치에 놓여 왕권은 유명무실화하고 대신들이 나라의 실질적 운영하는 재상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 유교의 차별적 형벌이 신권을 강화시켰다
초기 주(周)왕조의 봉건사회는 소위 국가사회의 범위가 좁은 만큼 그 조직이 비교적 간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예기'에서 말하고 있는 "예는 서민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형벌은 대부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규범의 실현이 가능했다.
중국 봉건사회의 핵심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적 유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