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다스 - 나이키
지난 2월 열린 2012 호주오픈테니스 남자단식 결승전. 5시간53분의 혈전 끝에 노박 조코비치가 라파엘 나달을 물리치고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나달의 티셔츠에는 나이키 로고가 박혀 있었고 조코비치는 아디다스 신발을 신고 뛰었다.
스포츠계에서 가장 유명한 브랜드를 꼽으라면 단연 아디다스와 나이키다. 독일에서 태어난 아디다스는 1980년대까지 유럽 시장을 휩쓸며 세계 스포츠 마케팅계의 제왕으로 군림했다. 반면 미국의 나이키는 참신하고 획기적인 스타마케팅을 앞세워 아디다스의 아성을 허무는 데 성공했다.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 모든 것은 ‘다슬러 형제의 신발공장(Gebrder Dassler Schuhfabrik)’에서 시작됐다. 1920년 독일의 아돌프(아디) 다슬러와 루돌프 다슬러 형제는 너무도 쉽게 닳아버리는 운동화에 불만을 갖고 집 세탁실에서 내구성이 좋은 신발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아디다스 수제 러닝화의 시초였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전설적인 육상선수 제시 오언스가 그들의 신발을 신고 대회 4관왕을 거두자 전문 스포츠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형제는 사업권을 둘러싼 갈등 끝에 갈라서게 됐다. 루돌프 다슬러는 1948년 회사를 떠나 ‘푸마’를 설립하고 아디 다슬러는 회사명을 자신의 이름을 딴 ‘아디다스’로 바꿨다.
1960~1980년대 아디다스는 적수가 없었다. 특히 ‘아디다스 축구화를 신지 않으면 일류 선수가 아니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아디 다슬러의 아들 호르스트 다슬러는 스포츠 용품 사업 진출을 시도했다. 프랑스에서 수영용품 ‘아레나’를 만들고 ‘르코크 스포르티브’를 인수하는 등 거침없이 사세를 확장해나갔다. 호르스트가 힘을 기울인 부분은 월드컵과 올림픽에 아디다스 물품을 독점 계약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방위적인 로비력을 동원해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의 임명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그가 스포츠 정치에 몰두한 사이에 아디다스는 경쟁력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대중의 취향 변화에 둔감해졌고 인건비가 높은 독일과 프랑스 공장의 이익률은 계속 떨어졌다. 결국 1992년 1억5000만마르크의 적자를 내기에 이르렀고 아디다스는 다슬러 가문의 손을 떠나 제3자의 손으로 넘어갔다. 위기에 빠진 아디다스를 살린 건 로베르트 루이스 드레푸스 회장이었다.
그는 경영진을 교체하고 공장을 해외로 옮겨 생산성을 높였다. 공용어는 독일어에서 영어로 바꾸고 길거리 농구, 월드컵 등 다양한 곳에 광고를 실었다. 아디다스는 4년 만에 재기에 성공했다.
●35달러짜리 나이키 로고
육상선수 출신의 필 나이트와 그의 코치였던 빌 보어맨은 1964년 일본 오니츠카 타이거사의 러닝화를 수입해 팔았다. 말이 무역이지 트럭에 신발을 잔뜩 싣고 운동장에 부려놓는 ‘보따리상’에 가까웠다. 회사 이름은 ‘블루 리본 스포츠(BRS)’.
1972년 두 사람은 직접 신발을 만들어 팔기로 결심하고 회사명은 나이키, 로고는 ‘스우시(Swoosh·바람이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로 정했다. 나이키신화의 시작을 알린 운동화 ‘와플 트레이너’는 보어맨의 아이디어였다. 그는 어느날 아내가 와플 굽는 것을 보고 운동화 밑창에 와플처럼 격자무늬를 넣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해서 처음 나온 신발은 와플 기계에 고무를 부어 밑창을 만들고 이를 신발바닥에 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BRS의 초기 멤버였던 제프 존슨은 어느날 “니케(Nike)”를 외치며 잠에서 깼다. 그리스 음유시인들이 꿈에 강림한 무사이 여신의 입을 빌려 노래했듯이 존슨 역시 꿈에서 승리의 여신을 만나 영감을 얻은 것이다. 니케의 날개와 옷자락의 흐르는 선을 따온 로고 스우시는 평범한 미대생 캐롤린 데이비슨의 작품이다. 데이비슨이 이 로고를 나이키에 넘긴 대가로 받은 돈은 고작 35달러. 2011년 나이키의 브랜드 가치는 139억달러까지 치솟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