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냐 시장이냐… 금융위기 맞아 다시 격돌 거인의 나이차는 16세였다.
서로에 대한 배려와 우정이 깊었지만 경제를 바라보는 생각은 천양지차였다.
대부분의 승리는 케인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하이에크였다.
20세기는 케인스의 시대였다.
불황은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이며 정부가 재정(돈)을 풀어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명쾌한 이론이었다.
케인스의 이같은 주장은 전 세계로부터 정치적 동맹군을 얻으면서 1930년대 대공황 이후 자본주의 세계의 지식과 정책,정치 분야를 지배했다.
경제학자는 누구나 케인시안이 됐다. 달러의 금태환을 정지시키며 세계를 혼돈으로 몰아넣었던 1970년의 닉슨도 “이제 우리는 모두 케인시안이 됐다”고 고백했다.
천하통일이었다. 하이에크는 오랫동안 잊혀졌다.
언제나 조용했던 하이에크는 2차 대전이 끝난 1948년 스위스의 로잔 호숫가 몽페를랭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은밀한 첫 모임을 소집했다. 신자유주의의 서막이었다.
유명한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은 이때 말석에 앉아 있었다.
대반격의 시작이었지만 아무도 몰랐다.
1970년대 들어 석유위기가 세계 경제를 강타하고 거대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낯선 괴물처럼 미국과 미국이 지배하는 세계를 짓누를 때 세상을 구할 자가 누구일지를….
하이에크였다.
그의 충실한 제자들,다시 말해 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의 대처를 투톱으로 내세워 지식 세계의 쿠데타를 만들어 냈다.
정부 아닌 시장의 자유가 경제를 구한다는 것을,대중 정치가 경제에 개입하면 인플레이션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을,사유재산권과 경제적 자유만이 부와 풍요의 원천이라는 것을,정부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치명적 자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조용히 웅변했다.
한마디로 ‘정부 대 시장’의 대립이었다. 기업가 동맹군은 하이에크를, 정치가 동맹군은 케인스의 편에 섰고 이는 지금도 되풀이 되고 있다.
언제나 케인스의 승리였으나 마지막 승리는 하이에크였다.
개혁개방에 목말라하던 덩샤오핑이 노령의 하이에크를 초대한 것은 1978년이었다.
덩이 물었다. “스승이여, 중국 인민을 굶주림에서 구할 방도를 가르쳐 달라.”
하이에크가 답했다. “농민들에게 그들이 생산한 농산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도록 하라.”
덩이 그렇게 농산물의 자유시장을 허용한 지 3년 만에 중국인들은 굶주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케인스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IMF의 설계자였지만 좌익 공산주의자로도 불렸다.
하이에크는 공산주의는 필연코 망한다는 주장을 일찍부터 펴왔다. 결국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 세계가 무너졌다.
완벽한 승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