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생 서강대 국제문화교육원장
☞ 한국경제신문 5월14일자 A39면
거의 20년 전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다.
호주에 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운전면허를 따는 일이었다.
필기와 도로주행시험을 힘겹게 통과한 내게 주어진 것은 이름과 생년월일,그리고 면허시험에 합격했다는 내용이 적힌 32절지 정도의 얇은 갱지 한 장이 전부였다.
나는 사진 한 장도 붙어 있지 않은 그 초라한 종이 면허증을 몇 겹으로 접어서 지갑 속에 넣어 다녔다.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도 학생증이라는 건 아예 없었고 대신 도서관 출입증을 발급받았는데 여기에도 사진은 없었다.
알다시피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개인 수표가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신용카드도 일상적인 지불수단의 하나가 된 지 오래다.
이들은 본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신분증이 있어야 활발하게 통용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주민등록 제도가 없는 서구 국가에서는 운전면허증이 유일한 신분증 노릇을 하고 있는데 사진 없는 운전면허증은 이러한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고 그만큼 시장의 거래는 제약을 받게 된다.
호주 사람들이라고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을 리 없지만 국가에 개인을 통제할 수 있는 위험천만의 수단을 주느니 차라리 그 정도 불편은 감수하겠다는 여론이 워낙 강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호주에서도 사진이 부착된 운전면허증이 일반화되고 있다고 한다.
신분증을 만들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실패로 돌아가자 정부가 꾀를 낸 덕분이다.
즉,희망자에 한해 사진을 부착하도록 하되,그 대신 이들에게 세금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는 정책을 꾸준히 시행한 것이다.
한편으로는 씁쓸한 소식이긴 하지만 현실을 언제까지나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정보화시대'라는 이름에 어울릴 만큼 정보의 저장과 처리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이제 신분증은 단순히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주민등록 번호 하나면 정부는 개인의 소상한 신상자료를 손쉽게 확보할 수 있다.
비단 국가기관이 아니더라도 은행이나 이동통신회사는 말할 것도 없고 백화점,병ㆍ의원 등의 민간기관들도 상당량의 개인 신상자료를 관리하고 있는 세상이다.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소득이나 가족 사항은 말할 것도 없고,오늘 누구와 어떤 전화를 주고받았는지,들여다 본 웹 페이지의 내용이 무엇인지,언제 어디에서 술을 마셨는지도 쉽게 알 수 있는 세상이다.
미국비자 면제 프로그램과 관련해 한ㆍ미 양국이 양해각서를 체결함에 따라 전자여권이 본격적으로 도입될 전망이다.
이미 외교관여권과 관용여권은 전자여권으로 전환됐으며 일반인들도 올 8월부터 전자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