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 상식에 도전한다- ③ 건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
“해방 전후史는 자유민주주의를 건설·발전시켜온 과정” 이영훈 교수와의 역사대담 세 번째 시간이 지난 7일 여의도 자유기업원에서 열렸다.
'건국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평가'를 주제로 진행된 이번 대담에서 이 교수는 해방전후사를 민족의 분단이 아닌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시켜온 역사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함께 당시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시대적 제약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며,건국과정에서의 이 전 대통령의 모든 공이 사장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황인혜=해방 후 좌우합작운동 등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전개됐지만 이승만의 단독 정부수립으로 좌절됐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고 미국 · 영국 · 소련 · 중국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 없이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 군정은 온건한 중간파 세력으로 김규식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이승만이나 박헌영처럼 대중 동원 능력이 없었습니다.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지원만으로 좌우합작운동이 성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런 가운데 1947년 동서냉전이 본격화되면서 미국이 공산주의 국제세력을 봉쇄하는 방향으로 한반도 정책을 바꾸자 좌우합작운동도 추진력을 잃고 맙니다.
당시 소련 점령 아래 있던 동유럽에서 좌우합작에 의한 임시정부가 많이 성립되지만 사회주의 정부로 넘어가는 단계에 불과했는데,그 상황을 이승만은 예리하게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구한말 나라가 망하는 것을 현장에서 피눈물로 체험한 이승만은 러시아(소련)가 어떤 나라인지 익히 알고 있었죠.또 기독교인으로서 공산주의 자체를 용납하지 못하는 정신세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그는 소련과의 협조 노선은 어떤 형태로든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승만 같은 명망가가 강력한 반공노선을 들고 신탁통치를 반대하자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참합니다.
특히 북한에서 공산주의 체제를 피해 남하해 온 100만명에 가까운 월남 동포들이 강력한 지지 세력을 형성합니다.
분단은 결국 '공산주의로 나라를 세울 것이냐''자유민주주의로 나를 세울 것이냐' 하는 건국 이념의 문제였습니다.
▼김승재=각각 이념에 따라 국가를 세운 것이라면 분단의 책임을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인지요?
"단일한 역사공동체였던 남북한의 분단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합쳐야 한다'는 당위론적 명분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이때 반드시 나오는 문제가 '역사적 정통성이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역사교육 현장에서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분단의 책임을 묻는 비판이 많이 제기돼 왔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