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전 기간의 경제적 변화를 한눈에 파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인구 추세를 그려보는 것이다. 인위적인 산아제한이 곤란하였던 전근대 사회에서 인구는 경제적 변화를 초래하고 생활수준을 결정하는 근본 요인이었을 뿐 아니라 결과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자원, 특히 식량이 풍부해지면 출생률이 높아지고 사망률이 낮아져서 인구 증가율이 높아지지만,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져 인구 압력이 높아지게 되면 출생률이 낮아지고 특히 사망률이 높아지게 되어 인구 증가율이 낮아지고 심하면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 전근대는 ‘다산다사’의 시대로 출생률이 높았지만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에 인구증가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인구 규모로부터 변화의 속도나 방향, 그리고 원인까지 알 수 있게 된다면 전근대 농업사회의 경제적 변화에 관해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조세 징수 목적으로 3년마다 호구조사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인구에 대해서도 아직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戶口式)에 따라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하였다.
각 군현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호적대장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해당 군현에서 보관하고 다른 2부는 감영과 호조로 보냈는데, 이로부터 전국의 호구 총수가 집계되었다.
이 호구 총수(1393~1861)에 의하면 조선왕조의 인구는 건국이후 15세기의 빠른 증가, 임진왜란(1592~1598) 이후 감소, 전쟁이후 17세기의 급속한 증가, 18세기의 정체, 19세기의 감소라는 추세를 그리며 변동하고 있었다(그림).
인구 임진왜란으로 감소 후 다시 증가
건국 이후 15세기에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것은 정치적 혼란이 수습되고 국방이 강화되어 사회적 질서가 수립되는 한편 농업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16세기 중엽에는 남부지방에는 더 이상 개간할 땅이 없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인구 증가가 한계에 도달한 것 같다. 여기에 임진왜란에 의한 인명 손실과 경지 황폐, 그리고 기근과 질병으로 인구가 격감하였다. 국가가 파악한 인구가 1543년 416만여명이었는데, 1639년에는 152만여명에 불과하였다. 이와 함께 임진왜란 직전에 150만결이었던 경지 면적도 전쟁 직후인 1601년에는 30만여결로 줄어들었다. 17세기에는 인구 압력이 해소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였다. 버려졌던 경지가 다시 개간되었으며 1688년께에는 “산골짜기 사이와 바닷가의 조그만 토지도 모두 개간되어 실로 노는 땅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비변사등록 숙종 14년).
조선 건국 초기 인구 550만명 추정
이와 같이 호구 총수만으로 조선시대의 인구를 파악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조선왕조가 파악한 호구는 실상과 큰 차이가 있었다. 조선왕조가 파악한 인구는 1393년 30만여명, 1519년 374만여명, 1861년 674만여명에 불과하였지만 조선왕조의 호구 총수로부터 추정한 실제 인구수는 조선왕조 건국 초에 550만명, 19세기 1800만명 정도였다(표 참고). 국가가 조사한 호구 총수는 실제 인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호구조사가 1925년부터 실시된 인구센서스와 같이 인구 관련 정보를 파악할 목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조세 징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인구를 실상보다 적게 신고할 인센티브가 지방 군현과 민간 모두 매우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