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유럽,염세로 손쉽게 국고 늘려
정부·민중 갈등,혁명으로 번지기도
소금은 생명이다.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체액의 평형이 깨지는데,물을 마시지 못할 때보다 더 위험하다.
이런 과학적 설명 이전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금이 생명에 직결된다는 사실은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소금이 떨어졌을 때 바로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는 사람들은 유목민이다.
사막을 건너는 유목민들은 물만큼이나 소금 확보 방안을 마련하고 길을 떠나야 한다. 그들은 소금이 묻힌 지층이나 은닉된 곳,보관소 등을 여행지도에 꼼꼼히 그려 넣는다. 오늘날에도 이런 행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소금의 수요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생산지는 한정돼 있으므로 당연히 교역이 양자를 연결해 주어야 한다.
아프리카 내륙에서는 먼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소금 무역이 계속되고 있다.
말리의 유명한 타우데니 광산에서 채굴된 암염은 사하라사막 너머 '검은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관문인 팀북투를 거쳐 700㎞에 걸친 3주간의 대장정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 길에는 늘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타우데니로 돌아오던 낙타대상이 사고를 당해 2000명의 인부와 1800마리의 낙타가 갈증에 시달리다 죽은 1805년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힘들고 위험한 장거리 여행 끝에 전해지는 소금은 같은 양의 황금과 맞교환될 정도로 비쌌다.
값비싼 소금은 경제적 가치의 상징이었다. 급여를 뜻하는 단어 '샐러리(salary)'도 소금(salt)에서 나온 말이다.
귀하고 비싸며 또 교역로를 따라 이동해야 하는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권력 당국의 통제 대상이 됐다. 이처럼 눈에 빤히 보이는 과세 품목도 따로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춘추전국시대에 제(齊)나라가 소금 전매제로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119년에는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철,술과 함께 소금을 전매품으로 묶었다.
소금 전매는 여러 차례 제정과 폐지를 반복하다 8세기 중반 당 왕조 숙종 때 확고하게 자리잡은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계속 이어졌다.
권력 당국이 과도하게 소금 값을 올리려 할 때 소금 밀매업자들,즉 염도(鹽盜)가 들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송대에는 염적(鹽賊),청대에는 염효(鹽梟)라 불렸던 밀매업자들은 관염(官鹽 · 정부가 공식적으로 판매하는 소금)보다 질 좋은 소금을 반값에 판매했다.
정부는 이런 자들을 잡아 한 섬 이상 거래한 자는 사형,한 말 이상 거래한 자에게는 태형을 가했지만 결코 이를 없애지 못했다.
소금을 둘러싸고 당국과 민중 간에 갈등이 벌어진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특히 프랑스의 염세인 가벨(gabelle)은 앙시앵레짐의 '봉건적 악제'의 대명사로서 흔히 프랑스 혁명의 한 원인으로도 거론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