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의 생활수준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개항으로 이러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에 들어간 우리나라는 공업화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왜 19세기 후반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20세기 후반에는 가능하게 됐을까?
‘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나라 안팎의 수많은 요인이 절묘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후진국에서도 공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제공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의 공업기술이 고도화되고 임금이 급속히 상승하게 됨에 따라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은 채산이 맞지 않게 됐다. 공장을 후진국으로 옮기거나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경공업부문뿐만 아니라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와 같은 중화학 공업부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이 선두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를 이끄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의 공업화가 진행됐다.
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채택
이러한 국제환경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공업화 전략이 수출지향 공업화였다. 후진국의 공업화 전략은 수입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과 해외시장에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하는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후진국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택했다. 높은 관세 장벽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함으로써 공업화를 달성하고 자립 경제를 만들려고 했다.
문제는 좁은 국내시장의 소비를 충족한 이후에는 생산을 증대하기 어렵고, 소비재 부문의 공업화 후에 부품, 기계, 소재 산업과 같은 중화학 공업으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점이다. 또한 두터운 보호로 인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는 산업이 발전하기도 어렵다.
우리나라도 1950년대는 공업화에 필요한 원료, 부품, 기계를 자체 생산할 수가 없었고 외화도 부족했기 때문에 원조 물자를 이용해 면공업, 제분공업, 제당공업과 같은 수입대체 산업이 성장했다. 관세율도 높았고 원조물자의 국내 가격을 낮추기 위해 원화가치가 시장보다 높게 책정됐기 때문에 수입을 조장하고 수출에는 불리했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0년대 전반에 수출지향 공업화로 전략을 전환한 것은 수입대체 공업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국제경쟁력이 있는 공업을 발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수출지향 공업화는 해외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갖추어야 했기 때문에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이용하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부문에서부터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을 도시의 공업 부문으로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업화와 함께 농가소득도 함께 상승했다.
돌이켜 보면 수출지향 공업화는 노동이 풍부한 후진국에 적합한 공업화 전략이었지만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1962년에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자립 경제를 위한 기반을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을 뿐 수출에는 관심이 없었다. 중도에 ‘수출 제일주의’로 전환한 것은 외화 부족의 곤란을 수출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57년부터 무상 원조가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지만 형편없는 국가신용으로는 차관도입도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양철판, 합판, 면직물이 괄목할 수출 실적을 올리는 것을 보고 수출에 활로가 있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던 것이다. 수출할 1차 산품이 많았거나 원조가 계속됐다면 수출지향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에서 역경이 도리어 기회가 됐다고 할 수 있다.
한·미·일 삼각무역이 수출증대에 큰 기여
한편 일본에서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경쟁력을 상실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우리나라로 생산거점을 이전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전경련도 1963년에 일본으로 산업조사단을 파견해 우리나라로 이전할 공업을 찾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5년의 ‘한일협정’에 의한 국교 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우리나라로 이전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61년에 1900만달러에 불과했던 대일 수출이 1965년에는 4400만달러로 늘어나고 1970년에는 2억3600만달러로 급증했다.
이뿐만 아니라 ‘한일협약’으로 일본으로부터 제공된 ‘대일 청구권’ 자금(무상원조 3억달러, 공공차관 2억달러, 그리고 3억달러의 상업차관)은 감소하는 원조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였다. 자금 일부가 포항제철 건설에 사용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