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함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절었다.
산허리는 온통 ○○○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서른다섯의 나이로 요절한 이효석(1907~1942)이 1936년 그의 작품에서 묘사한 곳은 강원도 봉평이다.
우리나라 단편소설의 백미로 손꼽히는 이 작품은 《메밀꽃 필 무렵》,○○○에 들어갈 말은 짐작하겠지만 '메밀밭'이다.
이맘 때 심는 여름메밀은 생장기간이 60여일이면 다 자랄 정도로 짧아 7~8월께면 수확을 한다.
매년 9월에 열리는 봉평 메밀꽃축제 때는 7~8월에 뿌리는 가을메밀이 만개한다.
그런데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애초엔 제목이 《모밀꽃 필 무렵》이었다. '모밀'은 메밀의 고어이기도 하고 지금은 방언으로 남아 있기도 한 말이다.
('뫼밀→모밀→메밀'로 바뀌었다. )
지금도 시중에서 여전히 모밀국수니 모밀냉면이니 냉모밀이니 하는 말이 쓰이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물론 표준어는 '메밀'이므로 모밀국수니 모밀냉면이니 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이는 조선어학회가 1936년 '조선표준말모음'에서 모밀을 버리고 메밀을 표준으로 잡은 이래 계속돼 온 것이다.
표준어라는 가치에 밀려 문학작품의 이름까지 바뀐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당시 조선어학회가 '메밀'을 선택한 것은 우리말에서 접두사로서 '메-'와 '찰-'이 활발하게 쓰이고,기본형으로 '메지다'와 '차지다'란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메-'는 (곡식을 나타내는 몇몇 명사 앞에 붙어) '찰기가 없이 메진'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메조/메벼/메밀/메밥 같은 게 있다.
이에 비해 '찰-'은 ('ㅈ'으로 시작되지 않는 몇몇 명사 앞에 붙어) '끈기가 있고 차진'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이다.
'찰떡/찰벼/찰밥/찰옥수수/찰흙' 같은 게 그런 것이다.
'ㅈ'으로 시작하는 말에는 '차조'(찰기가 있는 조)와 같이 기본형의 어근인 '차-'가 직접 붙는다.
하지만 이때의 접두사 '차-'는 따로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용례가 극히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찰밥'은 찹쌀과 팥,밤,대추 따위를 섞어서 지은 밥을 말한다.
이에 비해 '메밥'은 멥쌀로 지은 보통 밥을 찰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메밥이나 찰밥과는 달리 '쌀'과 결합한 '멥쌀/찹쌀'은 왜 형태가 달라졌을까.
여기에는 우리말에 화석처럼 남아 있는 옛말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이 말들에 들어 있는 비읍(ㅂ)은 '쌀'의 고어로부터 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