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초 동인지 <폐허>를 통해 문단에 허무주의 시를 소개한 공초 오상순은 특히 평생을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해 문인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그런 그가 살면서 단 한 가지 욕심(?) 낸 것은 바로 담배였다.
하루에 보통 아홉 갑을 태웠다는 그는 심지어 결혼식 주례를 보면서조차 담뱃불을 끄지 않았다고 한다.
오상순이 하루에 피운 담배 아홉 갑은 낱개로 치면 무려 '180개비'에 해당한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이 '개비'는 특이한 위치에 있다.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말 '개피' 또는 '가치'와 서로 단어로서의 세력 다툼 속에 있으면서도 유독 '개비'만 특별한 대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개비'나 '개피' '가치'는 사람에 따라 여전히 '180개피'에 익숙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180가치'란 말도 많이 쓰인다.
하지만 정상적인 단어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개비'뿐이다.
여기에서도 남북한 간 표준어를 다루는 유연성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가늘게 쪼갠 나무토막이나 기름한 토막의 낱개'를 나타내는 것으로 남한에선 '개피'나 '가치'는 모두 틀린 말로 처리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작가치,성냥가치,담배 세 가치' 따위의 말은 인정되지 않는다.
'개피'를 써도 마찬가지이다.
각각의 자리엔 오로지 '개비'를 써야 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에선 '개비'와 '가치'를 함께 쓴다.
그래서 '성냥개비'라 해도 되고 '성냥가치'라 해도 맞는 말이다.
이는 문화어(남한의 표준어에 해당)를 사정할 때 실생활에서 많이 쓰는 말은 모두 단어로 받아들인 결과다.
반면 남한에서는 비슷한 뜻을 갖는 단어가 여러 가지일 경우 그 중 많이 쓰이는 단어 하나만을 표준어로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담배 한 가치'는 '담배 한 개비'에 밀려 공식적인 표현에서는 얼굴을 내밀지 못하게 됐다.
'개피'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남북한이 마찬가지이다.
오상순이 수주 변영로와 물놀이를 가면서 술안주 대신 들고 갔다는 '담배 두 보루'에서의 '보루'는 담배 열 갑을 묶어 세는 단위를 나타내는 외래어이다.
'보루'의 어원은 영어 단어 '보드(board)'이다.
이 말이 보루로 된 것은 일본식 표기의 영향 때문이다.
나이 많이 드신 어르신들이 예전에 '보루바꾸'라고 하던 것이 있는데 이는 'board box'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보다 외래 문물을 앞서 받아들인 일본에서 그들의 문자인 '가나'로 이 '보드 박스'를 읽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