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둣발 들고 토끼다'는 어불성설?
# 나는 두 구둣발을 들고 힘차게 토꼈다. 성석제의 콩트 '성탄목'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그런데 그 표현이 간단치 않다.
'구둣발을 들고 토꼈다'라니….
구두를 신은 발이 '구둣발'인데 그것을 들고 어떻게 뛴단 말인가.
문단의 내로라하는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소설가 성석제가 '우리말 지킴이'를 자임하는 권오운씨에게 딱 걸렸다.
이태 전 나온 '작가들이 결딴 낸 우리말'(문학수첩)을 통해서다.
그는 이 책에서 "아무리 '줄행랑치다'를 과장되게 표현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두 발로' 뛰어야지 '두 발을 들고'는 뛸 수가 없는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사실 '구둣발 들고 토꼈다' 같은 표현은 논리적으로만 치면 '맨발 벗고 나서다'나 '팔 걷고 나서다(또는 팔을 걷어붙이다)'란 말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이치적으로야 어불성설이지만 오랜 세월 입에 오르면서 글자 그대로의 뜻보다는 '어떤 일에 아주 적극적으로 개입하다'라는 새로운 뜻을 더해 관용어구로 정착한 말이다.
성석제의 경우는 이보다도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인데,이런 수사적 표현이 글쓰기에서 종종 문법적 잣대와 충돌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세월을 훌쩍 거슬러 올라 일찍이 1959년 김동리와 이어령씨는 '어법과 은유의 한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비문 논쟁을 펼쳤다.
반론,재반론 등을 거치면서 인신 공격의 양상마저 띠었던 이들의 공방을 남영신 국어문화운동본부 회장은 자신의 책에서 '험악한' 것이었다고 평한 적이 있다.
두 사람 간 논쟁은 이어령 작품에 나오는 시구에 대해 김동리가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다고 비판하고,이어령은 은유적 표현을 두고 문법이란 잣대로 재단하려 든다며 맞받으면서 평행선을 달렸다.
쟁점이 된 표현은 '피들이 흘러가는 혈맥들''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 같은 것이었다.
우선 여기 쓰인 접미사 '-들'이나 목적격 조사 '-을'이 문법 범주를 벗어난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반적인 글에서는 이렇게 쓰면 안 된다.
그러면 은유법으로는 어떨까.
은유는 기본적으로 '의미'의 일탈을 통해 만들어지는데,여기에는 물론 한계가 있다.
그 한계를 넘었을 때 우리는 잘못된 은유 표현이라고 한다.
그러면 그 한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의미자질에 공통점이 있느냐 여부이다.
예컨대 10여년 전 화장품 광고 중에 '섹시 마일드(sexy mild)'란 카피를 쓴 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