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열강의 각축 속에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는 1896년 왕궁을 떠나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다.
바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이곳에서 고종은 거무스름한 색깔의 쌉싸래하면서도 향긋한 맛을 내는 음료를 접하곤 곧 이 맛에 익숙해진다.
그는 환궁한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덕수궁에 대신들을 불러 모아 함께 즐기곤 했다고 한다.
이상한 국처럼 생긴 이 음료가 처음 전해진 당시에는 이를 '가배'라고 불렀다.
지금의 '커피'를 가리키는 말이다.
'가배'는 커피의 발음을 딴 음역어로 대사전에 올라 있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이보다 더 그럴싸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바로 '양탕국(洋湯-)'이다.
커피의 검고 쓴 맛이 마치 한약을 달인 탕국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은 물론 서양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붙인 접두사다.
양탕국은 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은,말 그대로 민간어이다.
하지만 지금은 가배나 양탕국이나 커피에 밀려 모두 사어가 되다시피 했다.
2005년 한국 사회에 뿌리내린 커피의 역사를 시대별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엮은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란 책이 출간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서양의''서양식의''서양 원산의' 등의 뜻을 나타내는 접두사 '양-'은 무수한 파생어를 만들어내며 우리말을 풍성하게 했다.
그 중에서 '양탕국'과 같이 사어가 되다시피 한 말에 '양순대'도 있다.
이는 서양에서 '소시지'가 들어오니까 '순대'에다 '양-'을 붙여 만든 말이다.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고 사전의 올림말로만 남아 있다.
이보다는 덜하지만 양철이나 양은,양회 같은 말도 사회가 변함에 따라 그 세력이 많이 약해진 단어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통조림이나 석유통 같은 것을 만들 때 쓰는 양철(洋鐵)은 '안팎에 주석을 입힌 얇은 철판'을 가리킨다.
이것이 처음 들어올 때 전통적으로 쓰던 쇠와는 다른 재질의 쇠이므로 '철' 앞에 '양'을 덧붙여 양철이라 칭하게 됐다.
이를 '생철'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표준어이다.
이 말은 아예 '서양'과 '철'이 결합한 '서양철'이 음운변화와 함께 줄어들어 '생철'로 굳은 것이다.
지금은 '서양철'이라 하면 오히려 틀린 말이다.
'구리,아연,니켈 등을 합금하여 만든 쇠'인 '양은(洋銀)' 역시 그 색깔이 '은'과 비슷하다고 해서 만들어진 말이다.
'토목이나 건축의 재료로 쓰이는 접합제.' 이 풀이가 가리키는 말은 무엇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