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부터 1923년까지 독일 중앙은행 라이히스방크 총재를 맡았던 루돌프 하펜슈타인을 두고 당대 독일인들은 ‘돈의 총사령관(Geldmarschall)’이라고 불렀다. 후일 붙은 ‘초(超)인플레이션의 아버지(Vater der Hyperinflation)’라는 오명(汚名)이 더 익숙하긴 하지만 말이다.
하펜슈타인은 1871년 독일 통일 이후 유지되던 금본위제에 종언을 고한 인물이기도 했다. 1914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하루 전, 하펜슈타인은 금본위제 탈퇴를 선언했다. 독일 국민을 전시체제로 동원하기 위해 독일 중앙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많은 돈을 찍어내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하펜슈타인은 중앙은행의 금 태환 의무로부터 결별을 선언했다. 그리고 금을 보유한 독일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해 그들이 보유한 금을 국가에 헌납하도록 유도했다. 이는 어찌 보면 ‘사기’에 가까운 일이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여성이 자신의 목걸이와 팔찌, 결혼반지 같은 보석을 내놨다. 남자들은 시계와 훈장, 메달 등을 국가에 헌납했다.
어느 순간부터 금반지를 끼고 금목걸이를 하고 다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됐다. 국가에 금을 제공하면 ‘증명서’ 용도로 철로 된 장신구를 받았다.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에 대적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원됐던 ‘(군수용)철을 위해 금을 내준다(Gold gab ich für Eisen hin)’라는 문구가 다시 한번 사용되면서 독일 사회에 위력을 떨쳤다.
하펜슈타인 재임 기간 독일의 화폐 시스템도 출렁였다. 1871년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이 통일돼 제2 제국이 성립하면서 금본위 통화인 골트마르크가 독일 전역의 공식 통화로 통용됐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금 태환이 포기됐고 골트마르크는 발행이 중지됐다. 지폐밖에 발행되지 못했다. 새로운 화폐는 지폐로 발행됐기에 파피어마르크로 불렸다. 경화는 주조되지 않고, 지폐만 찍었기에 돈은 얼마든지 발행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어도 돈은 계속 풀렸다. 독일이 전쟁에 패하자 거액의 배상금을 갚기 위해 윤전기를 계속 돌렸다. 이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이어졌다. 1차 대전 이전 1파운드당 20마르크 선에서 외환거래가 이뤄졌지만, 1918년 12월이 되면 파운드당 43마르크로 화폐가치가 추락하게 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 체결 이후엔 파운드당 60마르크가 되고 그해 겨울엔 파운드당 185마르크까지 마르크 값이 폭락했다. 이어 1923년이 되면 파운드나 프랑, 리라와 마르크화를 교환하기 위해선 외국 통화당 무려 1조마르크가 필요했다. 화폐단위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 것이다.
물가는 정신없이 뛰었다. 1914년 8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검은 빵 한 덩어리 가격은 32페니히였다. 빵 가격은 전쟁이 끝난 1918년 53페니히로 뛰었고, 1923년 1월에는 250마르크(단위가 페니히가 아님), 3월에는 463마르크 50페니히가 됐다. 독일 내 모든 물건의 가격이 고공행진을 했다. 이후 거듭 뛰는 물가 탓에 액면가가 최고 100조마르크에 이르는 고액권이 등장했다. 전국의 133개 인쇄소에서 1783개 인쇄기가 밤낮으로 돈을 찍어댔지만 필요한 물건을 사기에 돈은 언제나 모자랐다. 사실상 화폐가 교환기능을 상실하면서 독일 경제는 물물교환 상태로 돌아갔다. 담배나 보석, 예술품들이 빵을 사기 위해 쓰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