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 타이드(Pink Tide)’라고 들어봤나요? 옛 소련 영향권 아래 중부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의 민주화 바람을 여러 가지 색상에 빗대 ‘OO 혁명’으로 불렀는데, 핑크 타이드도 비슷한 개념입니다. 바로 중남미 좌파 정치세력의 연쇄 집권 현상을 가리킵니다. 붉은색으로 상징되는 공산주의 정당이 아닌, 온건 좌파 정권이 유행처럼 들어선다고 해서 ‘분홍 물결’이라 부르는 것이죠.
핑크 타이드가 요즘 시들합니다. 어떻게 보면 역행하는 듯합니다. 좌파 정권이 연쇄적으로 균열되고 극우 정당들이 잇따라 집권하는, 즉 ‘파 라이트 타이드(Far Right Tide)’ 현상이 뚜렷합니다. 11월 19일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극우 성향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가 승리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11월 22일에는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자유를 위한 정당’이 제 1당으로 올라섰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네덜란드 외에도 많은 중남미, 유럽 국가에서 강경 우파가 득세하고 있습니다.
각 나라의 사정은 다릅니다. 중남미에서는 무능하고 부패하기까지 했던 좌파 정권에 대한 심판이, 유럽에서는 이민자·난민 급증에 따른 사회 혼란과 전통 가치 훼손에 대한 우려가 우파 지지로 모아졌죠. 우리나라도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있어 관심입니다. 세계 정치의 흐름이 왜 이렇게 바뀌고 있고,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4, 5면에서 짚어보겠습니다.
'10년 주기설' 무색한 남미 핑크 타이드 '썰물'무능·부패·과격한 집권 좌파에 급실망 한 거죠

핑크 타이드에는 ‘10년 주기’가 있다고 합니다.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10년에 한 번씩 급등하면서 중남미 좌파 정치세력이 민심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마다 중남미 좌파는 원자재 기업의 국영화 등을 통해 복지 재원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집권에 성공했습니다. 자원민족주의 노선에 유권자들이 표를 몰아준 것이죠. 하지만 곧 이어지는 원자재 가격 하락으로 ‘퍼주기’에 열중하던 나라 곳간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경기침체와 고물가·고환율로 경제는 파탄이 났고요. 그러면 다시 우파가 집권하는 쳇바퀴 같은 역사가 되풀이됐습니다.
벌써부터 균열하는 핑크 타이드
핑크 타이드가 본격화한 것은 1990년대부터입니다. 직전 남미의 외채위기, 국가 주도 경제모델의 한계, 심화하는 양극화 등이 계기가 됐죠. 1998년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대통령 선거에서 집권한 것을 시작으로 핑크 타이드가 본격화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중남미 인구의 4분의 3가량이 좌파 정권 아래에 있었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국제 원자재 가격의 하락으로 1차 핑크 타이드는 2015년께 막을 내립니다.
2차 핑크 타이드는 2018년 멕시코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 당선과 함께 시작됐습니다. 우파 정부에서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소득불평등이 심화된 데다 좌파 운동가들이 혁명가에서 포퓰리스트(대중 인기 영합 정치인), 민주주의 좌파 등 체제 안으로 들어온 것이 영향을 미쳤습니다. 2021년 6월 급진 좌파인 페드로 카스티요가 페루 대선에서 승리하고, 12월에는 칠레에서 학생운동가 출신의 가브리엘 보리치가 대통령에 당선됐죠. 이어 지난해 7월 좌파 무장단체 출신의 구스타보 페트로가 콜롬비아의 첫 좌파 정부를 수립하고, 10월에는 브라질 룰라 대통령이 재집권했습다.
하지만 2차 핑크 타이드는 오래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좌파도 똑같이 부패하고 무능하기는 마찬가지란 점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좌파 정부 아래 물가상승률이 100%를 훌쩍 넘으며 “오늘이 가장 싸다”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그 여파로 아르헨티나 극우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죠. 페루의 카스티요 대통령은 측근 부패 연루 의혹 등으로 탄핵까지 당했습니다. 칠레에서는 이전 우파 정부의 유산을 전면 부정하는 급진적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에서 부결되고 말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