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종교가 사람 사는 데 꼭 필요한지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도 많고, 그런 의미에서 현대는 종교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종교의 빈자리를 메운 이성의 윤리가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믿음의 힘이 세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여전히 미운 사람의 인형을 만들어 바늘로 찌르던 장희빈의 주술(呪術)은 원시사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다.
종교(宗敎)란 가르침이다.
교사(敎師)가 학생들을 가르치고 성인(聖人)이 백성을 교화(敎化)하듯,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윤리문제-무엇이 올바른 삶인가-에 대한 가르침을 준다.
종교가 사회의 올바름을 가르칠 때 인간은 집단 내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된다.
어떤 종교든 남을 어떻게 대하며, 무엇이 정당한 권력이고, 부(富)를 어떻게 얼마나 획득하고 보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과 부처님도 정치나 경제에 대해 한두 마디쯤 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제도를 자꾸 바꾼다는 점이다.
새 학년이 되면 담임교사가 늘상 하는 일처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근대 사회를 형성하게 되자 중세 사회의 윤리를 담당하던 종교도 새로운 명찰을 달아야 하게 되었다.
신의 명령 대신 합리적 사고와 판단력에 의지하는 이 불경한 존재들과 그 집단의 욕망을 향한 질주를 어떻게 해석하고 끌어 안을가를 답하기 위해 교회도 변신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여곡절(종교개혁)을 거쳐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교회의 공식적인 답변은 대략 ‘성실’과 ‘금욕’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혁명으로 얻은 자유를 쉽게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다.
압제와 불평등을 벗어나려는 자에게 ‘성실’과 ‘금욕’이 어찌 행동원리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자유주의 정치이념과 정통 기독교윤리는 이혼과 결혼을 반복해 애증이 교차하는 남녀와도 같은 관계에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적 기독교도 나오고, 그에 대한 반성도 나온다.
니버는 반성하는 쪽이다.
◆원문 읽기
어떤 사회 상황에서나 인간에게 있는 이상적 가능성은 항상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최고 선은 아무런 방해 없이 그들 본성의 본질적 잠재력을 발전시킬 수 있는 자유로 이뤄진다.
인격이란 훈련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러나 이상적인 훈련은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의 삶의 궁극적 가치 함양 이외 다른 어떤 동기를 가진 대행자들에 의해 부과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삶의 좀 더 충분한 발전 기회를 위해 서로 경쟁하는 사회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차선의 최고 선은 평등이다.
왜냐하면,경쟁하는 개인들의 가치를 동등시하는 원리 외에는 상충하고 있는 인간의 이해 관계를 중재할 최종적인 원리가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