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태 삼성전자 정보통신 총괄사장은 1948년생으로 대전 보문고와 인하대 전기공학과를 나왔다.
평범한 학벌에 석사나 박사 학위도 없다.
1973년 삼성전자 라디오과에 입사해 줄곧 음향기 관련 엔지니어로 일했다. 조금 괜찮은 경력이라곤 1985년 회사의 주력 생산품인 비디오 생산부장을 지낸 것 정도다.
이사 승진도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상사들과 잦은 마찰을 빚으며 수 차례 사표를 낸 전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직장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33년간 삼성전자를 다니는 동안 그 흔한 해외연수나 유학도 한번 간 적이 없다.
그러고도 이기태 사장은 오늘날 삼성 애니콜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우는 데 일등 공신의 역할을 해냈다. 글로벌 인재들이 득실대는 회사 내에서 5년째 최고경영자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에겐 무슨 비법이 있는 걸까.
이 사장은 투박하고 거침 없는 화술을 구사한다. 거두절미에 단도직입적인 스타일이다. 상대방의 논리보다 자신의 직관을 더 믿는 경향도 있다. 당연히 고집스러워 보인다. 이 때문에 초급 임원시절엔 "제멋대로이고 안하무인"이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1992년 임원이 돼 시작한 골프도 그의 성향을 잘 보여준다. 골프 클럽을 한번도 잡아보지 않은 상태에서 첫 라운딩을 했다. 전날 '골프 에티켓'관련 책을 한 권 구해 읽었을 뿐이다. 동반자들이 얼마나 황당해했을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 후로도 그는 연습장엔 간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축구 시작할 때 연습장에 따로 가서 배웁니까. 그냥 차면 되는거죠."
대전 보문고 시절 이 사장의 별명은 '깜빡이 없는 불도저'였다. 그야말로 좌충우돌이라는 얘기였다.
축구의 거친 몸싸움을 좋아했고 동네 '주먹'들과 '맞짱'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배짱도 두둑했다. 한 여름이면 통 반바지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죽어라고 공만 찼다. 그래도 성적은 상위권을 유지했다.
3형제 중 막내로 자란 그의 가정은 윤택하지 못했다. 등록금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았지만 어린 나이에 돈벌이에 골몰하던 날이 많았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1967년 인하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했다. 장래 희망은 여전히 사업가였고 축구도 계속했다.
삼성전자에 입사한 것이 1973년 7월. 당시 입사 동기생들이 삼성화재 이수창 사장과 삼성물산 건설부문의 이상대 사장이다.
삼성전자 내에서 라디오과-음향1과-음향품질관리실-비디오 생산부를 거치며 착실하게 실력을 쌓았다. 일단 시작한 일은 끝장을 봤다. 빠른 일처리와 확실한 마무리로 인정도 받았다.
물론 평탄한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대한민국의 현직 CEO 중 가장 많이 사표를 냈던 사람일 것이다. 과장-차장-부장 때 수시로 사표를 던졌다. 자신이 하는 일에 조직이 부당하게 간섭한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결행했다. 1985년 비디오 사업부장을 할 때는 강원도로 도망가 20여일이나 버틴 적도 있었다.
이 사장의 밀어붙이기식 일처리와 고집 때문에 상사들도 곤욕을 치렀지만 자신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장생활 최대의 스트레스로 주저없이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꼽았다.
"하루에도 몇번씩 되뇌었습니다. '지금 저 사람들이 나의 영원한 상사나 부하가 아니다. 이 순간이 지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고 말입니다."
1991년 9월 마침내 이사보가 됐으나 아직 그의 무대는 열리지 않았다. 수백명 임원 중 한 사람일 뿐이었다.
다시 몇 해가 흘러 1994년 1월 무선사업(DATA)부문 이사로 발령이 났다. 사람들은 "이기태가 물 먹었다"고 수군거렸다. 사실 무선통신은 비디오나 팩스사업부에 비해 홀대받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