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를 켜다
수도권 교외에서 매일 서울로 출퇴근 하는 직장인들에게 버스를 타는 것은 하나의 고역이다. 사람에 치이고 교통체증에 물리는 러시아워를 피하려면 해뜨기 전에 버스에 올라야 한다. 그런데 새벽 버스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다. 부족한 수면을 버스 안에서라도 채우겠다고 기대해보지만 이 기대는 자주 배반당하고 만다. 버스기사가 크게 틀어 논 활기찬 라디오 소리 때문이다. 버스기사들의 방송 취향은 독특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나라가 곧 뒤집힐 것 같은 목소리를 소유한 아나운서의 시사 프로그램이나 전쟁터로 군인을 실어 나르는 데 딱 어울릴 만한 행진풍의 음악으로 승객들의 옅은 잠을 흔들어 놓고야 만다. 이 정도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알아야 하고 지금은 편히 의자에 기대 잠을 잘 때가 아니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다.
부족한 잠을 채우려는 일념에 적잖이 방해되는 것이 틀림없을 것 같은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고 묵묵히 감내한다. 누구 하나쯤 '어이,기사양반 거 라디오 좀 끕시다'라고 말할 만도 한데 그런 사람을 보았다는 사람조차 만나기 어렵다. 혹자는 새벽 버스에 노인이나 아주머니들이 타지 않기 때문이란다. 지하철 같은 공공장소도 자신의 안마당 같은 주인의식으로 큰소리로 호통치거나 빈자리를 위해 전속력으로 내달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그분들의 예측하기 어려운 '간섭'을 간절히 초청하고픈 때와 장소가 있다면 바로 새벽버스다.
◆방송과 대동(大同)의 추억
아버지에게 김일 선수와 차범근 선수의 공통점이 무엇인지를 여쭤보라. 운동선수라는 점을 제외하고 두 선수가 아버지 세대에게 공통적으로 불러일으키는 추억이 있다. 두 선수 모두 1960,70년대 온 동네 사람을 TV 앞에 끌어모았던 전력이 있다. 두 선수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무엇보다 TV 자체가 드물었다. TV는 도시에서도 흔한 물건이 아니었다. 농촌에서는 한 마을 걸러 한 대씩 있었다. 김일 선수의 박치기나 차범근 선수의 문전돌파는 TV가 있는 집 마당에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그 몸짓을 되풀이해가며 감상하곤 했다.
방송이 한때 대동(大同)의 축제를 마련하던 계기였다면 버스기사들의 행동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기사들은 혼자 듣기 위해 라디오 볼륨을 높인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정보에 메마른 도시민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멍하니 앉았거나 피곤하게 서있는 승객들에게 잠시나마 흥겨움을 선사하기 위한 배려였을 것이 틀림없다. 프로그램 취향은 독특하지만 그런 방송이 버스를 이용하는 서민들의 평균적인 선호에 가장 가까웠으리라.
◆침묵이 상책이 된 이유 방송이 담당했던 대동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일일 뿐이다. 오늘날 승객을 배려한답시고 라디오를 켜는 순간 사회적인 행복을 감소시키게 되어 있다. 어떻게 라디오 하나로 사회적인 행복을 감소시킬 수 있을까? 승객마다 방송의 효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버스기사와 라디오 청취 취향이 비슷한 승객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 공짜로 들을 수 있으니 행복이 증가할 것이다. 취향이 아주 똑같지는 않더라도 방송이 그다지 싫지 않은 승객의 만족감도 다소 증가한다. 물론 싫거나 조용히 잠을 청하려는 승객들은 오히려 행복이 감소한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승객과 싫어하는 승객의 분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라디오 방송이 총 행복을 감소시킬지 증가시킬지도 알 수 없다.
20년 전이라면 많은 승객이 좋아할 것이라고 버스기사가 독자적으로 판단한 방송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누군가는 정말 그 방송 때문에 큰 만족을 얻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항의하고자 하는 승객이 펼 수 있는 논리라 봐야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는 정도다. 이런 이기적인 행동이 깍쟁이라고 비난받던 대동사회였다. 싫으나 좋으나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라는 것이 몸에 밴 학습이다.
◆이제,라디오를 꺼주세요 상황은 바뀌었다. 날로 발전하고 있는 휴대용 방송 수신장비 때문이다. 버스기사의 독단적인 방송이 승객들의 총효용을 증가시키려면 그 방송을 꼭 들어야 하는 승객이 많아야 한다. 그런데 그 방송이 꼭 필요한 승객은 워크맨이나 MP3혹은 PMP를 휴대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방송을 청취하는 이익이 클수록 버스기사의 취향에 운을 맡길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승객일수록 개인용 방송장비를 휴대하기 위해 지불하는 비용보다 이익이 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