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죽어요.
저 사람들 보세요.
주위에서 차를 굴리고 있는 저 미친 사람들.
저들은 거리에서 어떤 할머니가 털리는 걸 보면 지극히 몸사리는 바로 그들이에요.
한데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1968년 소련의 침공 이후 사회주의 개혁 운동을 주도했다가 조국 체코에서 프랑스로 망명한 밀란 쿤데라의 장편소설 '느림'은 첫 장에서 현대인의 이중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작한다.
현대인은 일상적인 위험을 경험하며,그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운전석에 앉는 순간 일상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잊게 된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인간에게 불안을 안겨줌과 동시에 불안을 극복(?)하는 힘도 선물하였다.
쿤데라의 말에 따른다면, 그것은 '기묘한 결합'이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있는 사람은 오직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
그는 시간의 연속에서 빠져나와 있다.
그는 시간의 바깥에 있다.
달리 말해서 그는 엑스터시 상태에 있다.
그런 상태에서는 자신의 나이,자신의 아내,자신의 아이들,자신의 근심거리 따윌 전혀 알지 못하며,따라서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는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끊임없이 자신의 물집들,가쁜 호흡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뛰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자신의 나이를 느끼며,그 어느 때보다도 더 자신과 자기 인생의 시간을 의식한다.
인간이 기계에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고 나자 모든 게 변한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있게 되고 그는 비신체적,비물질적 속도,순수한 속도,속도 그 자체,속도 엑스터시에 몰입한다."
신으로부터 자유를 얻어낸 이후 인간은 스스로의 이성에 발목이 잡혀 더욱 더 합리적으로 살 것을 스스로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과학 기술의 발전을 통해 속도감을 얻어낸 현대인은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한다.
더 이상 자유로운 개체로서 나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다만 나의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더 빠른 노동과 더 빠른 경험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과학 기술은 이성의 산물이며,이성은 인간 행복을 위해 신과의 오랜 투쟁 끝에 인간이 얻어낸 훈장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본성적 기쁨을 과학 기술의 속도감과 교환하게 된 것일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