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제는 죽음의 문제를 동서고금에서 어떻게 인식해왔는지에 대해 제시문을 통해 파악하고,현대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성찰해 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먼저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제시문 (가)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구하러 온 심미아스와 크리톤에게 자신이 어째서 죽음을 그대로 맞이하려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전반부와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와 해방이야 말로 철학자들이 특별히 마음을 쓰는 것"이고,그러므로 "죽음의 상태에 가깝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이 막상 죽음에 당면해서 마다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한다.
철학자들은 진리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인데,그토록 바라던 진리를 획득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죽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우리는 제시문 (가)에 나타나 있는 죽음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 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제시문 (나)는 장자에 실려 있는 진일,장자,자래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각각 보여주고 있는데,이들 모두에게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태어날 때를 만났기 때문이며,그가 어쩌다 이 세상을 떠난 것도 죽을 운명을 따랐을 뿐인 것"이고,삶과 죽음이란 "춘하추동이 되풀이하여 운행함과 같다".그래서 죽은 사람은 "천지라는 커다란 방에 편안히 누워있는 것"이며,"삶과 죽음이란 이렇듯 하나로 이어진 것이니,내 삶을 좋다 함은 바로 내 죽음도 좋다고 하는 게"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들 모두는 삶과 죽음을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자연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노자의 죽음을 대하는 진일의 태도나 아내의 죽음을 대하는 장자의 태도는 슬픔과 아쉬움이라기보다는 섭리를 따르는 무연한 태도라고 볼 수 있다.
제시문 (다)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그녀에게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로 여겨질 만큼 죽음이란 그녀에게 피해야 할 것이며,그에 따라 그녀가 아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독신(瀆神)을 저지를 만큼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제시문에서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명확하게 짚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제시문 (가)는 죽음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고,제시문 (다)는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쉽게 드러난다.
제시문 (나)는 죽음이 삶과의 순환 속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순응하도록 요구한다.
이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제시문 (다)에서 죽음이라는 것을 제시문 (나)와는 달리 '삶과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제시문 (가) (나)와 달리 죽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부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제시문 (다)에서 간파하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죽음의 의미가 어째서 이렇게 부정적으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해 접근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죽음을 부정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죽음이 갖는 또다른 의미가 무엇이 될지를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제시문(다)의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매우 고통스러워한다.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을 외침과 절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은 그녀로 하여금 마침내 신과 세계 전체를 부정하는 데에까지 이끌어가고 있다.
앞으로 이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끊임없이 떠올릴 것이며 그럴 때마다 기억의 고통스러움에 괴로워하며 생각할 것이다.
'내 아들의 죽음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
성경의 욥기를 보면 주목할 만한 장면이 있다.
욥기의 주인공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이유 없는 고통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 괴로움의 끝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난다.
아마 욥처럼 이 어머니도 자식의 죽음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곱씹어 생각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마침내 어느 순간 어머니는 자식의 죽음을 그다지 고통스럽지 않게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경험을 떠올릴 수 있다.
그 고통의 내용은 단지 죽음만이 아니다.
가난에 힘겨워하는 사람,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 등 고통 받는 사람들 모두에게,자신의 경험했던 고통을 떠올리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은 어떠한 과정인가.
바로 그 어머니가 다른 사람들(즉 타자)을 이해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고통을 토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바라볼 수 있는 태도에서 우리는 '참된 진리'의 의미와 만나게 된다.
어머니에게 고통을 안겨준 아들의 죽음은 개인적 삶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해서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죽음과 고통의 의미는 바로 타자의 삶을 포용하고,그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윤리의 토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학생들이 결론에서 다다를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드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도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
이 모든 예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고통을 쉽게 수용하지 않으면서 참다운 신뢰와 믿음 속에 '영원자'와 끝까지 싸운 사람은 무의미한 고통 속에서도 결국에는 참된 진리를 찾아낸다'는 것이다.
아무도 고통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고통 당해 본 사람은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고통 가운데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배우고,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제시문 (가)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죽음을 긍정하는 철학자의 태도는 삶의 참된 의미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소크라테스가 말한 이데아의 상기와 이데아의 인식을 기반으로 한 현실 적용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