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송 - 카파
1800년대 말 등장한 사진은 처음에는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하지만 카메라 크기가 줄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진은 서서히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자리잡게 된다. ‘사진을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과 ‘전쟁의 참상 등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치열하게 진행된다.
이 같은 움직임의 최전선에 있었던 인물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과 로버트 카파다. 이 둘의 삶과 사진은 대조적이었다. 사진가들의 공동체를 함께 만들고 새로운 사진문화를 탄생시킨 동료이기도 했다.
●'사진으로 美를 추구브레송은 1908년 프랑스 노르망디 샹틀루 지방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섬유회사를 경영했다. 맏아들인 브레송이 가업을 이어가 주길 바랐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 파리에서 2년 동안 회화공부를 했고 초현실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브레송은 그러나 화가로서 자신의 재능에 한계를 느꼈다. 현실에서 도망치듯 그는 1931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행 배에 올라탔다. 닥치는 대로 일했고 오스트리아 사냥꾼을 만나 사냥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다.
그가 사진기를 본격적으로 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사냥을 하지 않을 때는 중고 카메라를 들고 나가 사진을 찍었다. 당시 그가 찍은 사진들은 ‘기록사진’이라기보다 독창적인 기하학적 구도를 강조하는 ‘초현실주의 예술’에 가까웠다. 그는 아프리카를 돌아다니다 풍토병에 걸려 죽을 뻔했고 1년 만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브레송은 마르세유에서 소형 라이카 카메라 한 대를 구입한 뒤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1932년 파리에서 브레송이 찍은 ‘생 라자르역 뒤’는 그의 대표작이다.
<비가 그치고 나서 바닥에는 물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한 중년 남성이 그 위를 묵직한 발걸음으로 뛰어넘고 있다. 수면에는 이 남성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반영된다. 뒤편으로 보이는 조그만 포스터에는 여자 무용수가 남자를 비웃듯 가벼운 발놀림으로 점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사진은 순간을 포착하는 단두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뒤 전쟁에 참여한 브레송은 1940년 6월22일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하이델베르크 인근 수용소에서 3년간 육체노동을 했다. 1943년 2월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그는 1944년 파리 해방의 순간을 생생하게 필름에 담아내며 화려하게 복귀했다.
1947년 이후 그는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중국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을 여행하며 동양사람들의 생활과 풍토 등을 서구에 알리기도 했다. 간디의 마지막 모습을 찍기도 했다.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에 러시아(당시 소비에트연방)와 쿠바를 방문해 철의 장막 뒤편에 감춰진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했다. 1955년 루브르박물관에서 사진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다양한 사진을 찍으면서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했다. 여느 사진가와 달리 ‘뜻밖의 상황’에 집중하고 ‘의외성’을 선호했다. 1965년 처칠의 장례식장에서 그가 찍은 사진은 세인트폴성당으로 들어오는 장례행렬이 아니라 좋은 자리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청소년의 모습이었다. 브레송은 1974년 사진계를 떠났다. 그림과 디자인에 몰두하며 이후 은둔자로 살았다. 2004년 8월2일 향년 96세로 타계했다. 그의 묘비에는 “사진은 영원을 밝혀준 그 순간을 영원히 포착하는 단두대”라고 써 있다.
● 불후의 명작 '병사의 죽음'로버트 카파의 본명은 안드레이 프리드만이다.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으로 1913년 부다페스트에서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그의 삶은 청소년 시절부터 순탄치 않았다. 17세였을 당시 헝가리는 파시스트 독재정권이 장악하고 있었다. 카파가 공산당원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 1931년 독일 베를린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카파는 기자를 꿈꿨다. 베를린대에서 공부하며 언론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위해 데포트통신사에서 암실 조수 아르바이트를 했다.그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32년 11월27일이다. 카파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하는 러시아의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 사진을 찍는 일을 맡았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기자들이 중형 카메라를 쓰고 있어 집회장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카파는 소형 카메라를 숨겨 연단 가까이 접근했다. 카파의 사진은 슈피겔지(紙)의 한 면을 가득 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