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심으로 대하면 기계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우리 산업계에 ‘섬유 한국’을 일으킨 거목이 있었다. “성심을 가지고 일한다면 설령 기계가 구형이라고 해도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말한 분이다. 바로 지난 17일 별세한 김각중 경방 명예회장(향년 87세)이다.
고(故) 김 회장은 평생을 섬유산업을 꽃피우고 지키는 데 바쳤다. 그의 섬유 사랑은 2004년 펴낸 자서전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가지 않은 길》에서 잘 나타난다. “불쑥 공장에 들어가 보면 실이나 방직기들이 내는 미세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살피는 마음이 곧 성심(誠心)이라고 생각한다.”
고인은 국내 최초의 면방직 기업인 경성방직을 설립한 고(故) 김용완 회장의 1남4녀 중 장남이다. 모친은 인촌 김성수 선생의 막내 여동생인 고(故) 김정효 여사로,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이 외사촌이다.
1944년 연세대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이과를 거쳐 1956년 미국 베리어대를 졸업하고 1964년 미국 유타대에서 이론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고려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1969년 경방 감사직을 맡아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섬유산업은 초기 경제발전 단계인 1960~1970년대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변변한 산업이 없었던 이 당시 산업 역군들은 뭐든 만들어 수출해야 했다. 1975년 부친의 뒤를 이어 경방 회장에 취임한 고인은 섬유수출 기업으로 경방을 키워냈다. 그는 숱한 난관을 극복한 기업인으로 유명하다.
1980년대 섬유산업이 어려움을 겪고 중공업이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으면서 ‘섬유산업 사양론’이 일었다. 1984년 정부는 산업합리화 대상으로 섬유업종을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할 정도였다. 당시 고인은 “1970년대 식의 호황은 벗어나 있지만 섬유 사양론이 거론되는 것은 옳지 않다”며 “수출로 국내 섬유산업의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맞섰다. 섬유산업에 더이상 투자해서는 안된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인은 경기도 용인 공장을 신설하는 승부수를 띄우기도 했다. 이 같은 결단은 1987년 수출 1억달러를 달성하는 금자탑으로 이어졌다.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창립이념에 충실했다.
고인은 1990년대 저임금에 기반한 중국 섬유의 급부상으로 섬유 사양론이 더욱 뚜렷해지자 유통분야로 시야를 넓혔다. 경방필백화점에 이어 2009년 서울 영등포 옛 경성방직 자리에 초대형 복합쇼핑몰 타임스퀘어를 오픈했다.
그는 재계 어른으로서 책임도 외면하지 않았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두 차례에 걸쳐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맡았다. 그는기업 재단의 효시로 장학재단인 경방육영회를 운영, 인재 육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고인이 평소 “산업발전과 동시에 기업에 종사하는 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 철칙”이라고 말한 것처럼 회사 내부적으로 가족과 같은 기업문화로 노사화합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고인의 평생 경영이념은 ‘상식과 양식에 따른 경영’이었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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