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화폐개혁… 국가가 주민들 '쌈짓돈'까지 빼앗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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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화폐개혁… 국가가 주민들 '쌈짓돈'까지 빼앗아간다

정재형 기자2009.12.02읽기 7원문 보기
#화폐개혁#부의 재분배#시장경제 통제#환율 (100:1)#물가 안정#유동성 수축#강제 저금#달러화·위안화 의존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 시장경제 견제위한 ‘富 재분배’ 북한 당국이 1992년 이후 17년 만에 화폐개혁을 전격 단행했다. 북한전문 온라인매체 데일리NK는 북한 내 소식통을 인용,북한이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화폐 개혁을 단행한 데 이어 오후 2시부터 교환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화폐 개혁은 모든 동전과 지폐를 대상으로 이뤄졌으며 교환 비율은 100 대 1이다. 또 1인당 최대 교환금액을 10만~15만원(40달러 안팎,우리 돈 5만원 정도)으로 제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북한에선 1 · 5 · 10 · 50 · 100 · 200 · 500 · 1000 · 5000원 등의 지폐와 10 · 50전,1원 등의 동전이 쓰여져 왔다. ⊙ 시장경제 통제 · 견제용 '부 재분배'북한이 화폐 개혁을 단행한 이유는 단순히 물가를 잡기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과거 북한의 화폐 개혁 사례에 비춰 주민들이 보유하고 있는 돈을 국가가 몰수하기 위한 시장 통제 정책으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가구당 교환 가능 액수를 제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데서 북한 당국의 이 같은 의도를 쉽게 읽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물가가 안정되려면 공급과 생산성이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화폐 개혁만 가지고는 경제를 안정시킬 수 없다"며 "이번 화폐개혁의 목적은 경제 안정보다는 일종의 '부의 재분배'의 의미가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으로 시중에 흘러 다니는 돈이 크게 늘어나자 국가가 통제하지 못하는 돈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화폐개혁을 단행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북한은 1947년 이후 이번까지 총 5차례에 걸쳐 화폐교환과 개혁을 단행했다. 가장 최근의 화폐교환은 1992년 11월에 이뤄졌다.

당시엔 구권과 신권의 교환비율을 1 대 1로 정하고,각 가구당 교환액수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북한 은행들은 만 17세 이상 성인에 한해 1인당 300원씩 교환해 줬다. 기타 개인이 가지고 있던 돈들은 2만원 한도까지 적금으로 받아줬으나 그 이상은 전면 무효화했다. 말이 화폐교환이지 신권과 구권을 교환한다는 명목으로 주민들이 갖고 있던 쌈짓돈을 국가에서 빼앗아 간 셈이다. 화폐개혁으로 북한 경제의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동용승 삼성경제연구소 북한경제팀장은 "시장에 깔려 있던 돈을 끌어 들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상당한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 북한 소식통은 "이번 화폐개혁으로 오히려 위안화나 달러화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켜 북한 경제가 더욱 취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 북한 상거래 마비,큰 혼란북한 당국의 전격적인 화폐개혁으로 북한 내부 상거래가 사실상 전면 중단되는 등 사회 전체가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 전문 인터넷매체인 데일리NK는 1일 소식통을 인용해 "화폐교환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30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까지 시장과 직장 업무가 일제히 중단되는 등 대혼란이 발생했다"고 전했다.

또 혜산 시장에서는 장사를 하는 여성이 화폐개혁 소식을 듣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실신했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들도 목격됐다고 현지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대북 인권단체인 '좋은벗들'은 인터넷 소식지를 통해 "물건을 파는 상점과 목욕탕,식당 등이 거의 다 문을 닫고 장거리 버스 운행도 중단했다"고 알렸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평양발 기사에서 한 상점판매원의 말을 인용해 "상품의 새로운 가격이 아직 정해지지 않아 물건을 팔 수 없다. 적어도 일주일은 지나야 어느 정도 정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전했다. 또 북한 당국은 1인당 교환 한도액을 넘는 돈은 은행에 저축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저축액도 30만~300만원까지 제한이 있는 데다,북한 은행은 예금주 마음대로 돈을 빼낼 수 없는 '강제 저금소'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불만이 폭증하고 있다고 한다. 1992년 화폐 개혁 때는 1인당 2만원까지 저축하게 했지만 나중에 돌려준 것은 몇천원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경제 불확실성이 높아지자 북한 장마당(시장) 물가는 종전보다 10~20배까지 치솟은 것으로 전해졌다. 1㎏에 2000원 수준이던 쌀값은 4만원(우리 돈 약 2만원)으로 뛰었고,회령 시장에서 500원 하던 두부 1모도 1만원(우리 돈 약 5000원)에 팔린다고 한다.

⊙ 다음엔 가격자유화 후 시장개방으로?북한이 전격 단행한 화폐개혁은 사회주의 체제를 버리고 개혁 · 개방을 선택한 1980년대 베트남의 전례와 유사해 향후 북한 경제운용 방향이 주목되고 있다. 베트남은 1979년부터 1981년까지 북한의 '7 · 1조치'와 유사한 임금 및 가격 현실화 조치를 취한 뒤 심한 인플레이션이 이어지자 4년 만인 1985년 '10 대 1'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실제로 물가 현실화 이후 베트남을 강타한 인플레는 현재 북한보다 훨씬 심각했다. 베트남은 또 화폐개혁 이후에도 물가가 잡히지 않고 경제 운용도 순탄하지 않자 1989년 가격의 완전 자유화를 선언,시장경제 요소를 대폭 도입했다.

북한이 이번 화폐개혁의 후속 조치로 어떤 것을 구상하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북한 당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결국 북한경제는 베트남처럼 가격자유화를 통한 적극적 개방기조로 나아갈 개연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측이다. 이영훈 한국은행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그동안 흐름을 볼 때 북한은 베트남의 경제개방 과정을 답습할 가능성이 크다"며 "북한 당국은 가격 자유화를 원치 않을 수 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은 실제로 7 · 1조치 이후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먼저 도입한 중국 베트남에 관료나 연수생들을 보내 선진 금융기법과 금융개혁 경험 등을 연구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이번 화폐개혁에 이어 머지않은 미래에 금융개혁 등의 후속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화폐개혁으로 재원을 확보하면 그 다음 단계로 금융기관을 설립해 공장,기업소 등을 만드는 데 자본을 투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2006년 초 일반인과 기업소 등을 상대로 예금 대부 결제 등의 업무를 하는 상업은행을 만들었으나 자본금 부족으로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화폐개혁을 통해 운용자금을 마련하면 본격 가동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물론 화폐개혁이 북한경제의 퇴행을 가져와 결국 그 여파가 중간층 이하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장성호 한국경제신문 기자 ja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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