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양곡관리법 개정안에 대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7년 만입니다. 2016년 5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회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법률을 만들고(제정) 개정하는 입법권은 국회의 권한입니다. 국회가 본회의에서 의결한 법률안은 대통령이 공포해야 하는데, ‘이의’(다른 의견)가 있을 때에는 국회에 재의(다시 의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거부권은 행정부 수반으로서 대통령이 입법부(국회)를 견제하는 민주주의의 고유한 장치입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개정안은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의무적으로 매입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은 “시장의 쌀 소비량과 관계없이 남는 쌀을 정부가 막대한 혈세를 들여서 모두 사들여야 한다는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며 반시장적 포퓰리즘 법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국회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은 방송법, 간호법, 노란봉투법 등 윤 대통령이 거부할 것으로 예상되는 법률안을 잇달아 국회에서 통과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이들 법률안은 정부가 수차례 반대 의사를 밝힌 것들입니다.
합의제 의사결정 기관인 국회의 입법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숙의(deliberation)’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알아봅시다.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법률안 거부권을 정당화하는 사유들은 무엇인지 이해해봅시다.
국회의원들의 '숙의'를 보장하지 않으면…'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 어려워요

민주주의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정치 방식입니다. 봉건시대의 왕이나 독재자가 국민을 지배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국민 모두가 국가 권력의 주인입니다. 오늘날 가장 보편적인 민주주의는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과 대통령 같은 국민의 대표를 뽑아 그들에게 국가 권력를 맡기는 ‘대의민주주의(간접민주주의)’입니다.
‘직접민주주의’는 고대 아테네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이 권력을 ‘직접’ 행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도 대표를 뽑았습니다. 다만 선거가 아니라 ‘추첨’으로 선출했습니다.
선거와 자유위임
왜 선거가 아니라 추첨이었을까요.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선거로 선출되는 대표자는 ‘공공의 이익(interest)’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와 달리 추첨으로 뽑힌 대표자는 ‘공공의 의사(will)’를 반영해야 합니다.
공공의 이익과 공공의 의사는 무슨 차이가 있냐구요. 먼저, 공공의 의사를 반영해야 하는 추첨을 통해 뽑힌 대표자는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의 의사(뜻)에 반하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이를 가리켜 ‘기속위임(binding-mandate)’이라고 합니다. 권력을 위임받기는 했는데 자신이 대표하는 사람들의 의사를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에서 기속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선거로 선출된 대표자는 자유위임(무기속위임)이라는 지위를 갖게 됩니다. 자신에게 투표한 사람들의 뜻과 다르더라도 공공의 이익과 국가이익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유위임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300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해 국회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국회에 법을 만들 수 있는 권력인 입법권을 부여합니다. 개별 국회의원이 입법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국회를 ‘합의제 의사결정 기관’이라고 부릅니다.
입법과정의 핵심 ‘숙의’
국회의원들에게 자유위임을 보장하는 이유는 그들이 합의제 의사결정 기관인 국회에서 ‘숙의(deliberation)’를 통해 공공의 이익을 찾게 하기 위함입니다. 숙의는 국회의원들이 대화와 토론을 통해 법률안에 대한 자신의 찬성 또는 반대 의견을 유지하거나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복잡하고 시끄럽고 비용이 많이 드는 합의제 의사결정 기관을 운영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숙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