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은 정치인과 유권자 간의 매개체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지방자치단체장 등 공직 후보자는 공약을 개발해 유권자에게 지지를 호소하고, 유권자들은 쏟아지는 공약들을 평가해 후보자를 선택한다. 물론 후보 선택은 공약 외에 리더십, 이념, 성품, 개인적 선호도 등이 어우러져 결정된다. 민주주의 선거에서 공약은 매우 중요하지만 어느 것이 참된 공약인지는 판단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공익과 사익에서 공약은 때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일단 공약을 내놓고 보자는 후보자들도 많다. ‘당선 만능주의’가 우리나라의 정치풍토만은 아니지만 민주주의 수준에 비춰볼 때 공약이 지나치게 부풀려지는 사례가 많다는 것이 일반적 지적이다. 합리적 공약을 제시하고, 가능한 한 공약이 지켜지는 풍토가 조성돼야 정치 민주주의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 이기심이 낳은 중우(衆愚)정치
고대 민주주의 발원지는 아테네다. 하지만 교과서에도 자주 언급되는 아테네 민주정치는 중우정치로 몰락했다. 중우정치는 다수의 어리석은 대중이 이끄는 정치를 의미한다. 플라톤은 이런 민주주의 타락에 실망해 ‘국가론’에서 현명한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인정치를 주장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산정치’를 주창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최근 대중 민주주의 위기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대중에 영합하면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정치인들은 ‘당선 만능주의’에 빠져 무리하게 공약을 남발하지만 유권자들은 그것을 판단할 능력이 약하거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공약을 판단해 포퓰리즘(대중인기 영합주의)이 극성을 부리는 토양이 돼간다는 것이다. 남유럽 재정위기에서 보듯 과다한 복지는 경제에 부담이 되고 장기적으로 국가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지만 여전히 ‘공짜의 유혹’이 표심을 흔드는 것이 현실이다.
# 포기된 무리한 공약들
대선 때마다 무리한 공약이 남발된 것은 어느 선거 때나 비슷하다. 또 무리한 공약이 정권에 부담을 준 사례도 적지 않다.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후보는 금융채무에 관한 파격적 공약을 내놓았다. 신용등급 7~10등급에 해당하는 720만명의 채무를 재조정하고 기존 금융채무 불이행자의 연체기록을 모두 말소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른바 ‘720만명 신용대사면’ 공약은 서민의 표심을 어느 정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 금융질서 파괴, 재정부담 등의 우려가 커지면서 결국 공약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7000억원 규모로 조성된 신용회복기금을 통해 연체액이 3000만원 이하인 신용불량자 72만명의 이자를 감면해 주는 방식으로 대폭 축소됐다. 한반도 대운하 공약도 ‘4대강 살리기 사업’으로 쪼그라들었다.
김영삼 대통령 정부의 쌀수입 반대나 농어민 연금제 도입, 김대중 대통령 정부의 농가부채 모두 탕감, 내각제 개헌,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동북아 실크로드, 성장률 7% 달성 등도 역대 정권에서 포기하거나 거의 지켜지지 못한 대표적 공약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걸고 쌀 수입을 막겠다”고 했지만 불과 취임 10개월 만에 우루과이라운드 농산물협상이 타결되면서 사과담화까지 발표했다.
#'空約'은 반드시 비난받아야?
공약의 실천엔 돈(재정)이 필요하다. 또한 국가의 재원은 세금이 바탕이라는 것도 상식이다. 따라서 공약의 명분이 아무리 그럴듯해도 재정이 뒷받침하지 못하면 사실상 공약 이행이 불가능하다. 공약 실천만을 위해 무분별하게 세금을 올리고 돈을 찍어내는 것은 국가 지도자의 올바른 리더십이 아니다.
남미 경제의 발목을 잡은 포퓰리즘이 자주 도마에 오르는 것은 지나치게 인기영합주의적 공약을 남발하고 이런 공약이 경제에 부담을 주는 악순환이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후보자에서 지도자로 바뀌어 국가의 재정사정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본 후 곳간이 비었다고 판단되면 공약의 우선순위를 조정하고 일부는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