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보호하고자 세운 정부가 바로 그 자유를 파괴하는 프랑켄쉬타인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밀턴 프리드먼은 ‘자본주의와 자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조하고자 한 점은 분명하다. ‘권력을 제한하지 않으면 자유는 언제나 위협받는다.’ 그는 왜 정부 같은 권력을 의심했을까.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정부는 늘 무제한의 권력과 ‘규제의 왕국’을 꿈꾼다는 그의 걱정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민주주의의 타락?
자유의 반대는 통제와 규제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어떤 종류의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든, 통제와 규제는 기본적으로 자유를 침해한다. 통제와 규제가 생겨나는 과정은 간단하다.
첫째 민주주의 자체에 그런 속성이 있다. 민주주의는 투표를 통해 주권을 표현한다. 우리가 대의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이다. 투표를 통해 의회의원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뀐다. 이 말을 바꿔 얘기하면 공직 후보자들은 투표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때 통제와 규제의 싹이 튼다. A집단을 위해 이런 공약을 하고, B집단을 위해 저런 공약을 한다. 심지어 A를 규제해 B를 보호하기도 한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C의 것을 빼앗아 D에게 주겠노라”, “A가 이런 사업을 못하게 하겠노”라고 약속한다. 특정 규제를 약속한 후보자가 당선되면 다음 선거에서 경쟁자는 더 많은 규제를 내놓는다.
둘째 관료주의의 속성 탓이라는 분석도 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정부와 의회의 권력은 공익보다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들이 공익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무원 스스로도 자기이익이 극대화되는 정책을 선호하고 그것이 곧 규제의 신설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방정부에서 규제가 늘어나는 이유도 이런 공공선택론적 해석으로 풀이할 수 있다.
셋째 잘못된 법치주의 의식수준도 한몫을 한다. 우리는 대개 국회에서 만들어지면, 정부에서 만들어지면 모두 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통적인 법치주의 이론에서 특정 목적, 특정 집단을 겨냥한 입법은 법은 아니다고 본다. 즉 법은 만들어진다고 모두 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은 국가의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인 만큼 그것이 개인들의 자유를 침해하는지에 따라 제한해야 한다고 법치주의자들은 지적한다.
사법영역까지 공법 침해
우리가 법치주의라고 할 때의 법치는 우리가 오랜 기간 동안 전통과 관습을 통해 확립된 법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계약을 어기면 처벌받는다는 것은 오랜 상관습이다. 바로 사법(私法)이다. 법치에선 이 조항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오늘날 정부와 의회는 ‘이런 계약은 안된다, 저런 계약은 안된다’고 간섭한다. 계약은 한 당사자가 불리하면 성립되지 안는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보는 계약이란 있을 수 없다. 안하면 그만이다. 사법의 영역에 아주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공법이 끼어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들 속에 내재된 유토피아 심리도 원인이 된다. 현재를 지옥으로 규정하고,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계획하고 만들 수 있다는 정치 슬로건에 쉽게 넘어간다. 나치즘, 소련식 사회주의, 북한식 전체주의가 그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휩쓸리면 모든 규제 권력은 중앙에 집중된다. 개인의 자유, 시장의 자유는 질식한다.
큰 정부선호는 본능?
우리가 큰 정부, 작은 정부를 구분할 때 규제가 얼마나 적으냐, 많으냐를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규제가 많을수록 정부의 권한은 더욱 커진다. 규제가 많을수록 법규를 자기 멋대로 해석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럼 우리나라에선 최근 얼마나 많은 법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자. 연도별 규제입법 수를 보면 안다. 2007년 5114건이던 규제건수가 2009년 1만2900여건으로 껑충 늘었다. 2011년엔 1만4000건이 넘었고 2013년에는 1만5000건이나 양산됐다.
문제는 이런 법을 만든 국회의원들조차 무슨 법인지를 모른다는 점이다. 어떤 시장에서 누구를, 어떻게 규제하는지, 어떤 나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조차 없이 규제를 찍어냈다. 무제한적 민주주의가 법의 타락을 가져온다고 경고한 지 오래다. 한국은 이런 우려가 현실화된 나라 중 하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