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욕망에 갇힌…그래서 자아가 상실된
이십대의 어느 날, 이 책을 읽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입속에는 침묵이 가득 찼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나 자신조차 무서워 들여다본 적 없는 스스로의 심연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 된다. 감당할 힘 없이 진실을 마주했다가, 우리는 자멸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쳐버린 사람들도 알고 있다. 경고하건대 이 소설은 함부로 첫 장을 넘길 책이 아니다.
에리카.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여선생이다. 서른이 넘은 그녀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노모는 일과표에 따라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고, 통제한다. 어머니는 딸을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왔다.
에리카는 이른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의 악보체계에 묶여 있었다. “그 다섯 개의 선은 그녀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녀를 지배해왔다.” 에리카는 피아노 외의 어떤 충동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훈육받았으며, 어머니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져 살아왔다.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도 시체와 다름없었고, 끝내 죽어버림으로써 모녀에게 가난과 공허를 남겼다. 어머니와 딸은 삶을 예술로써 보상받으려 했으나,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단둘이 살아온 모녀 앞에 뒤늦게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젊은 미남자인 클레머는 자신만만하게 이 병적으로 왜곡되고, 이상에만 매달려 있고, 잘못 떠받들어진 정신에만 의지해 사는 괴상한 지성인 에리카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것은 오래된 연애의 방식이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데 위치한 그녀를 소유함으로써 예술적 고양을 느끼고, 그녀는 자신을 통해 진짜 삶의 맛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는 결코 그녀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에리카는 육체 없이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분리된 적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의 육체는 스스로에게 낯선 미지다. 에리카가 홀로 비밀스럽게 저지르는 자해나 관음증은 스스로의 몸을 가지지 못한 유령의 불안과 공포를 드러낸다. 오래전에 욕망을 거세당한 에리카는 타인의 욕망을 훔쳐보고, 그것을 억지로 가지려 하고, 여의치 않을 때는 망가뜨리는 쪽을 택한다. 예술적 성공을 꿈꾸며, 피아노 훈련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차단하고 유보시킨 에리카의 삶은 이토록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다.
에리카의 자의식은 성장에 실패한 어린아이의 것과 같다. 자신을 욕망하는 클레머의 시선 앞에서 에리카는 어찌할 바 모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의 몸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 따뜻한 양수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싶다”. 따뜻하고 축축한 어머니의 감옥. 바로 그곳에 갇혀 자신이 이토록 망가져버린 것을 알면서도, 에리카는 언제나 그 감옥으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주는 안식은 그만큼이나 매혹적이다. 그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처하던 집이며, 모든 영양분의 공급자이자, 삶의 설계자이다. 딸은 어머니의 인생을 보고, 습득하며, 답습한다. 그 안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 안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머니 옆에 들러붙어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며, 어머니만을 바라본다. 이제 서른을 넘긴 에리카는 그녀의 삶을, 육체를, 침대를 점령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물어뜯으며, 한탄하듯 사랑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악몽이다. 깨어날 때를 놓쳐버린, 악몽과 같은 삶.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자신의 마음과 반대되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그녀는 어째서 고통과 학대를 원한다고 하는가. 그녀는 오직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관계밖에 배운 것이 없으며, 스스로 느껴본 유일한 감각이라곤 고통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에리카에게 접근했던 클레머는 점차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그 여자는 그의 생각대로 고상하지도 않고, 여성스럽지도 않으며, 애초부터 아름답지도 않았다. 에리카가 그에게 매달릴수록, 클레머는 잔인하게 그녀를 조롱한다. 그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그녀를 짓밟고 넘어간다.
눈부신 햇살 속,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움직이는 거리 한가운데 선 에리카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것에 문을 걸어 잠그고 고립되어 살아왔는가 자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