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광대의 독백…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하인리히 뵐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던 문학청년 시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자주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하인리히 뵐의 책을 처음 만난 것도 헌책방에서였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희귀한 책들의 설렘이란 어떤 다른 종류의 감응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경이에 가득 찬 경험이었고, 누렇고 빛바랜 페이지의 갈피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기록이나 낙서들, 메모들, 때로는 어떤 편지 비슷한 쪽지들이나 영수증 따위의 목록은 헌책방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진귀한 보물들이다. 하인리히 뵐의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라는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하던 순간의 경이에 대해 나는 자주 후배들이나 대학의 강단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지금은 절판이 되어버린 이 책을 틈날 때마다 소개하는 이유는 책 속에 담긴 한 문장 때문이다. “작가는 대충 임신할 수 없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의 상상력은 이미 너희 안에서 완전히 임신되어 있다고. 그것을 꺼내는 일이 문학이 아니라, 그것을 먼저 응시하는 일이 인간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시간이 흘러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농밀하게 작가의 뜻에 교감하게 되었다.
전후 독일의 폐허문학 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가에게 상상력이란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한 자가 바라보는 새로운 과제였고, 그에게 문학이란 그 폐허 위에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으로 그에게 영예를 안겨준 귀한 명분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당대의 어떤 작가보다 문학으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의 생명성은 인간의 현실성과 그 한계에서 오는 다양한 징후들을 관찰하는 일이다. 문학이 비루해진다면 문학이 가지고 있는 생명성이 비루해진 것이 아니라, 문학 안에서 인간의 생명성을 찾는 행위가 나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 안에서 언제나 인간은 허약하다.
하인리히 뵐이 그토록 찾고자 했던 ‘사람다운 언어’란 인간이 자신의 허약함을 진실되게 서술할 때 가장 사람다워진다는 진정에 답한다. 하인리히 뵐에게 진정한 자유란 인간이 수치심으로부터 자신을 극복하는 순간에 태어난다. 인간을 동물과 구별하고 인간을 사회화 속에서 규명하기 위해 언급하는 중요한 본질적인 세 요소가 수치심과 허영심 그리고 죄의식에 있다면 인류의 문학은 고대에서 지금까지 이 수치심과 허영심 그리고 죄의식으로부터 거의 모든 자원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하인리히 뵐은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로부터 그러한 인간의 내적 질서들을 서술이 아닌 고백으로 만들어나간다.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는 한스 슈니어라는 주인공의 25장의 독백이다. 어떤 벽 앞에서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아무도 그 뜻을 이해하기 힘든 춤을 추는 듯한 이 광대의 독백은 당대의 정치, 문화, 사회에 대한 하인리히 뵐의 냉정한 성찰이며 견해이기도 하다.
책 전체에 주인공인 한스 슈니어를 광대라고 부르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오로지 한스 슈니어만이 자신을 광대라고 부른다. 끝끝내 어딘가로 건너갈지 알 수 없으나, 어딘가로 분명히 전달되기를 바라는 자의 독백은 우리가 살고 있는 광대의 현실과 상상일지 모른다.
한스 슈니어는 “나는 늘 상상을 이기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자신 안에 존재하는 광대에게 회상을 들려주기도 하고 아버지와 기나긴 대화를 하기도 하며 어떤 사건과 사건의 연속성이 아닌 통화 도중 갑자기 상대가 수화기를 내려놓은 세상으로 전화 통화를 하듯 내밀한 이야기를 다룬다. 내밀성으로부터 인간은 어떤 순간을 모은다고 수화기 너머로 광대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어릿광대야. 그리고 순간을 모으고 있지.”
흔히들 그의 소설엔 출구가 없어 보이는 미로적인 요소가 많다고 한다. 아마도 그의 소설이 특별히 전위적이거나 드라마틱한 사건의 계기가 있지 않음에도 이러한 언급이 출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소설 속에서 연속적이며 내적인 사건과 독백이 만나며 생기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진실된 관계 같은 것에 작가의 양심과 상상력이 동원되고 있고 그 감상으로부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스토리텔링)가 중요시되는 소설에서 독백은 언제나 급진적이거나 이단적이므로, 그게 아니면 독백은 진부하거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는 끼어서는 안 되는 아웃사이더의 서술 같은 것에 가까울 것이므로.
한스 슈니어는 매번 새로운 장을 통해 새로운 사건들로 가는 통로를 만들며 그곳에 자신의 독백을 ‘종전이 임박한 상황’처럼 다룬다. 가령 광대는 “깨달음은 타격이었다. 마리는 이미 떠나갔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인간살이 중에 인간성을 버리면 소문뿐이다”라는 은유를 남기기도 한다. 작가의 어떤 독백들로부터 탈출할 수 없도록 독자는 작가가 만들어가는 사회에 참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