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이별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랬네.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의 주인공처럼 곧 서른이 되는 즈음에 나는 떠나왔네. 나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던 아내는 없었지만.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서울을 떠나오던 1992년 늦가을, 나는 내 방에 있던 가구와 책과 편지와 사진들을 정리했다. 어수선한 방 안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짐 싸는 것을 멈추었다. 책을 읽다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보였다. 키가 큰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 나를 방문하던 사람들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들 모두와 이제 이별을 깊숙이 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지.
결국 우리는 생애의 어떤 순간과 동일시할 수 있는 책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까? 이 책이 그랬다.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처음 왔던 나에게는 이 책이 있었지. 받았던 짧은 편지는 없었으나 해야 할 긴 이별은 있었기에. 이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마음속에서 로드무비를 찍다보면 한 시절과 이별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책 속의 편지는 짧지만 긴 이별 여행으로 주인공을 이끌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뿐 아니라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시간들을 한꺼번에 환기시킨 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시절과 이별을 하지 않으면 더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 나 역시 그랬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스스로를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지. 스스로를 바꿀 힘이 내 안에 없다면 떠나는 방식이라는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부 유럽의 아주 작은 도시, 마르부르크로 왔었지. 그 무렵의 나는 한트케의 말을 인용하면 이랬다. “이 두려움.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다른 존재로 변신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합쳐져서 나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쏘다니는 일. 한트케의 주인공이 미국을 쏘다니는 것처럼 나 역시 쏘다녔다. 라인 강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마인 강변으로 갔지. 값싼 기차표를 구해 독일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19세기 말의 건물과 발코니만 즐비한 도시의 골목을 걷기도 했지.
어떤 변화가 나에게 찾아올까? 기적처럼 다른 존재로 나는 서른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책을 읽었지. “내가 받은 인상들이라는 게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인상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거야. 그 말은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보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해.” 변한다는 건 뭘까? 사물을,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걸까? 보는 것이 달라지면 인식도 달라지고 그 달라진 인식이 또다른 사유를 하게 만들까? 어쩌면 내가 변할 때 진정한 이별이라는 거, 찾아오는 건 아닐까? 주인공의 삶은 “많은 것을 허용받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과거와 이별을 하고 싶지만 떠나와서도 옛날과 마주친다.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온갖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 있어. 어릴 적에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주변 세계가 두 조각이 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로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아.” 길 위에서 나도 자주 나의 과거와 마주쳤지. 그 과거 안에서 요동치고 있던 감각도, 누군가를 생각하던 혹은 미워하던 버릇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한트케도 그렇게 적어두었네.
떠나는 일은 쉽지만 길 위에서 한 시절과 진정한 이별을 하는 것은 어렵지. 한 인간에게 어떤 시절,이라는 것은 한 보따리의 시간만이 아니야. 어디 길 위에서 턱, 버리고 올 수 있는 무엇도 아니지. 다만 그 시절을 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한 시절과 이별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소설의 말미에 존 포드의 물음이 나온다. “이젠 당신들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유디트는 그들이 왜 이곳까지 왔으며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할퀴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이제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도.
이 일이 진짜 일어난 사실이냐고 묻는 존 포드에게 그녀는 말하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네.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버린 한 시절.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면 우린 깜짝 놀라지, 그런 때가 있었나, 라고.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 속을 서성이다가 마치 신발을 들고 조용히 사라져버린 손님처럼 우리 바깥으로 나가버린 거야. 그때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지. 그 시간이 나를 이만큼 살아오게 했고 또 절망하게 했고 그리고 이제 시절로만 남았네, 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