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아무나 하나
내 나이 서른여섯에 엄마는 뭘 했나, 떠올려본 적이 있다. 지난 추석 때였고, 대낮부터 전 부치는 엄마 옆에서 그걸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다가 살짝 취기가 돌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어쩌다 저 여자는 나를 갖고 나를 낳아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 내 어미가 되었나. 세상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 우리가 모녀라는 이름으로 묶였나. 엄마가 손으로 찢어 입에 넣어준 묵은 김치를 씹으며 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와 가장 먼저 한 것이 울면서 엄마의 김치를 냉동실에 얼리는 일이었다고 고백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히 그는 천재다, 이런 고마운 힌트라니.
엄마 나이 서른여섯에 난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 엄마는 그야말로 진짜배기 엄마였던 셈. 회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부터 회칼을 썩썩 갈아 생선살을 뜨기 시작하는 게 엄마였고, 마당을 부리나케 쏘다니던 쥐새끼를 장독대 뒤로 몰아서는 연탄집게로 찍, 여보란 듯 눌러 죽이는 것도 엄마였으며, 키우던 진돗개가 동네 개천에 빠졌을 때 동시에 첨벙, 그 더러운 시궁창에 뛰어들어 원더우먼처럼 한 팔에 개를 안고 나온 것도 엄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도둑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이 나돌자 엄마가 꺼내 보인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가스총이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총을 처음 만졌을 때의 그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라니, 엄마는 가스총을 장롱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여기 총을 가진 또 한 명의 엄마가 있다. “역경을 겪느라 아주 괴짜가 된 엄마는 이 권총을 언제나 가방에 넣고 다녔다”지. 우와, 장롱도 아니고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라면 이 엄마, 엄청 센 아줌마 맞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엄마니까. 앤절라 카터의 소설집 《피로 물든 방》 속 표제작 ‘피로 물든 방’에는 이렇게도 터미네이터 같은 캐릭터로 분한 엄마가 나오신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욕먹으며, 반항적으로 가난을 택한” 이 엄마는 군인이었던 남편이 “전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부인과 자식에게 유산으로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과, 훈장으로 가득 찬 시가 상자와 낡은 연발 권총”밖에 남겨주지 않은 까닭에 이 총을 받아들게 된다. 총, 그러니까 엄마가 달라고 해서 뺏은 것도 아니고 쏠 일이 생겼을 때 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한 세상이 직접 내어준 것이 바로 이 총이었던 것이다.
앤절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을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열 편의 이야기 모두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그림자의 잔상을 풍긴다. 그 뼈대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동화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푸른 수염’, ‘미녀와 야수’, ‘장화 신은 고양이’, ‘백설 공주’, ‘빨간 모자’ 등등에서 말이다. 보아하니 차용의 목적은 분명 깨는 데 있을 것이다. 파헤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강제해왔던 그 모든 허울 좋은 신화라는 길들여진 관습으로부터 종교도, 사회도, 문화도 다시금 바라보는 일. 따지고 보면 이는 문학의 특기 가운데 하나 아닐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일인이 있다면 그가 바로 문학이어야 하듯 말이다.
감칠맛 나는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피로 물든 방》은 참으로 묘한 매력을 두루 갖춘 소설이다. 줄거리를 더 줄이면 이렇다. 가난한 과부의 딸이자 예민한 손가락을 가진 열일곱 소녀가 돈 많은 후작에게 시집을 갔으나 알고 보니 그가 자신의 여자를 여러 방식으로 죽이는 취미를 갖고 있었고, 소녀 역시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으나 딸의 전화 한 통에 ‘모성적 텔레파시’를 느낀 엄마가 바람같이 달려와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후작의 머리통에 총을 쏘았다더라, 정도.
‘모성적 텔레파시’라는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믿기 어렵겠지만 모녀 지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묘한 일체의 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날치기를 당한 내가 경찰서에서 울고 있을 때 새벽 3시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엄마가 이러기도 했으니까. 꿈에서 네가 날 막 찾지 뭐야. 너 지금 어디야. 이렇게 도저히 설명할 길 없이 내 온몸에 끼쳐지는 어떤 전율 같은 거, 찰나의 침묵 같은 거, 그것이 바로 ‘모성적 텔레파시’ 아닐까.
탄력 있는 문장에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 치밀한 묘사와 더불어 어떤 현실 앞에 맞장을 떠버리는 인물들의 기개에 소설을 읽는 내내 시원하면서 칼칼한 목 넘김을 경험한 나는 앤절라 카터 앞에 붙는다는 여러 수식어들을 다시금 찾아봤다. ‘여성 에드거 앨런 포’라거나 ‘영문학의 마녀’라니, 그와 더불어 폭력과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유명하다고 하여 다시금 형광펜을 들고 책장을 넘겨가며 밑줄 그을 준비를 하였으나 내가 그은 유일한 문장은 이랬다. “도움이라면. 엄마.”
그리고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려봤다. 피로 물든 방이 피로 물든 지구임을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어쨌거나 엄마만이 이 피를 멈추게 할 수 있을 터, 이 피를 닦아줄 수 있을 터, 그러니 내게 엄마 언제 되느냐는 소리 좀 마시라. 왜냐, 엄마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