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불행, 더 많은 환란을!
중독은 대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술이나 문장에 중독되는 건 문장에 심취해서도 술을 사랑해서도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사랑하고 취하려 애쓰는 척 스스로를 몰아가려는 경향에 불과하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라는 물음은 타당할 수 있지만, 대개의 경우 중독엔 딱 꼬집어 말할 만한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
맥락이 있다면 그건 중독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몰입의 속도와 관련될 뿐, 어떤 일관된 내용과 지향점을 갖지 않는다.
그저 빠지기 위해 빠져들 뿐이다. 《몰락하는 자》는 내뱉기에 중독된 자의 처절한 자기고백으로 읽힌다.
“글렌과 냉혹성, 글렌과 고독, 글렌과 바흐, 글렌과 골트베르크 변주곡, 난 생각했다.
글렌과 산림 스튜디오, 인간에 대한 글렌의 증오, 음악에 대한 증오, 음악인에 대한 증오, 난 생각했다.
글렌과 간결함, 식당을 둘러보면서 난 생각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알아야 해, 난 생각했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지……”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페터 한트케, 엘프리데 옐리네크 등과 더불어 20세기 독일어권 문학계의 이단아로 통한다.
셋은 공히 오스트리아에서 성장했으나 모국에 대한 분노와 인간과 예술에 대한 환멸을 독자적인 방식의 언어 살해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종종 같은 범주로 묶인다.
하지만 문학사의 특정 경향은 한약방의 약재 상자처럼 일목요연하게 분류될 수 없는 법이다. 문학은 결국, 어떤 개인의 지독한 체취에 불과할 수 있다.
토마스 베른하르트는 자기 안의 요설들을 가감 없이 토해내는 방식으로 기존 소설의 서사구조를 뒤틀어놓는다. 그렇게 그는 오스트리아 문학계의 ‘악한’ 또는 ‘내부의 적’이 됐다.
《몰락하는 자》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화자인 ‘나’와 친구 베르트하이머는 28년 전 레오폴츠크론 지역에서 호로비츠로부터 피아노를 사사했다. 그때 그들은 살아 있는 피아노의 신화 글렌 굴드를 만났다.
베르트하이머는 글렌의 천재성에 절망을 느낀 나머지 피아노를 포기하고 정신과학에 빠져든다.
그러다가 끝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밑도 끝도 없는 장광설을 풀어놓는다.
‘나’는 베르트하이머가 자신의 불행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 자살한 것이라 결론짓는다.
그러나 여기서 잘 알려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관계를 연상하는 건 문제의 핵심에서 많이 벗어난다.
이 작품은 인간관계의 어떤 정식이나 애증의 복합구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베른하르트는 예술과 자연, 사랑과 집착, 그리고 질투에 대한 뿌리 깊은 천착을 통해 언뜻 뒤집어진 채 매장돼 있는 숨은 진실들을 파헤친다.
이를테면, 더 악해지거나 죽기 위해 사는 열망도 존재한다는 사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