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과 소비하는 것
10년 동안 공부하면 네이티브 스피커처럼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영어교육 광고와 6개월만 하면 귀가 뚫린다는 광고가 있다면 어느 쪽이 더 믿을 만한가? 그야 당연히 10년이다. 그렇다면 어느 광고를 유심히 읽게 되고 결국 돈을 내게 될까? 그건 아무래도 6개월 쪽이다.
소비자들은 효과가 나타나는 기간의 장단(長短)에 민감하다. 3년 동안 꾸준히 읽고 쓰면 논술시험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쯤은 다 안다. 그래도 수능이 끝나고 1개월짜리 프로그램에 등록한다. 하루 한 시간씩 운동을 하거나 그냥 걷기만 해도 건강해지고 남부럽지 않은 몸매를 만들 수 있다. 그래도 돈을 쓰는 쪽은 먹기만 하면 되는 건강보조식품과 1개월에 10kg이 빠지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이다. 장기적인 처방은 믿을 만하고 저렴하다. 그러나 눈에 띄는 변화는 없다. 단기적인 처방은 신뢰하기 어렵다. 게다가 비싸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눈에 띄는 변화에 기꺼이 지불한다.
◆다이어트의 진실 살을 빼는 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요는 유지가 안 된다는 게 문제다. 단기적으로 살을 뺄 수 있는 다이어트 프로그램은 흔하다. 정 안 되면 굶어도 되고 수술도 있다. 의학은 비만과의 싸움에 힘에 달리고 사실상 패배하고 있다고 자인한다. 병적비만을 위해 고안된 위절개나 소장우회술 같은 시술은 수술 중에 사망할 수도 있지만 효과도 단기적일 뿐이다. 위의 80~90%나 쓸모없게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살이 찐다. 환자는 고열량의 음식을 조금씩 자주 섭취하는 방식으로 작아진 위에 저항한다. 턱의 일부를 변형해 고형의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해도 고열량의 드링크를 통해 살이 쪘다.('나는 고백한다,현대의학을' 아톨가완디) 비만과 싸우는 의사들은 인간의 몸이 '형상기억합금'처럼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힘이 강하다고 실토한다. 더구나 이 힘의 원천이 몸보다도 뇌에 있다고 추정한다. 뇌를 통제하기 전에는 외과적 방법을 통한 비만치료의 효과는 사실상 일시적일 뿐이라는 말이다.
◆논술준비,읽고 쓰기만 빼고 다 한다. 지난해 우리나라 가구당 도서 구입비는 월 8000원이 안 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저며 담배 소비 월 2만2000원,화장품 1만1000원과 비교해도 처참한 수준이다. 지난 2~3년간 논술이 국민적 관심사였던 사실을 고려하면 매우 흥미롭다. 논술 붐이 독서 행태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독서라는 정공법을 선택한 학생이나 학부모가 거의 없었다고도 할 수 있다. 서울대 권장도서처럼 어려운 책을 읽히는 논술학습법에 문제가 있다는 우려도 극히 일부의 사례를 지나치게 과장했던 셈이다. 대다수 학생에게 논술은 수능 끝나고 한두 달 바짝 준비하는 또 하나의 과목일 뿐이다. 족집게 학원 강사의 예상문제 풀이와 잡다한 배경지식을 순식간에 머리에 입력하는 암기과목이다. 학생들은 논술을 위해 독서와 사색,꾸준한 글쓰기만 빼고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논술문제가 지나치게 어려우니 제발 교과과정에 맞춰 달라는 주문은 사실은 익숙한 학습 즉,외우기,찍기,벼락치기만으로도 충분한 시험으로 만들어 달라는 생떼였는지 모른다.
◆그래도 합리적인 소비 단기적인 해법을 제시하며 소비자를 유혹하는 사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동일하다. 바로 정신적 위안. 불안의 해소. 정신적인 만족이 전부는 아니라고 해도 비싼 돈을 내는 이유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돈 안들이고도 확실한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불확실한 방법에 돈을 지불하는 행태를 설명하기 어렵다. 건강을 위해,영어를 위해,논술을 위해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정신적 위안치고는 그래도 싸게 먹히는 셈이다. 시간당 수십만원 하는 정신과 상담이나 우울증 치료보다는 어쨌건 저렴하지 않은가?
◆장기적으로 우린 모두 죽는다 영화가 재미있느냐를 가지고도 치열한 논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준 디워의 한 장면. 부라퀴의 목표가 새라 한 명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수사당국은 그녀를 조용히 없애버리려고 한다. 새라를 죽이려는 책임자에게 이든(남자주인공)이 반박한다. 어차피 비극은 반복될 것이라고. '그래 나도 안다. 그러나 그건 500년 뒤의 일이다. 그건 내 알 바 아니다.' 수사관의 답이다.
이 대사는 유명한 경제학자 케인스의 전매특허였다. 케인스는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옹호한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고장난 자동차와 같다. 유능한 운전자가 수리해가며 몰아야 한다. 고용을 늘리기 위해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이면 단기적으로 국민총생산은 늘어난다. 소득이 늘어난 근로자들이 소비를 시작하면 정책의 효과는 파급된다. 그러나 정부가 사용한 자원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사업의 원천이 세금이라면 국민의 주머니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고 국가가 국민 대신 소비한 셈이다. 파급효과라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정부사업의 원천이 국민 저축이라면 다른 사업가가 빌릴 돈을 정부가 가로챘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