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비는 종이었다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 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후략)
미당 서정주의 시 '자화상'의 일부다. 시인의 고백처럼 그는 노비의 자식이다. 아마 그의 성(姓) '서'씨는 아버지 주인집의 성인지 모른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 성씨(姓氏)가 있어서 자신은 한때 고귀했던 가문의 자손일거라 믿고 있지만 상당수는 3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성(姓)조차 없던 천출(賤出)이 분명하다.
◆촉수엄금(觸手嚴禁) 종족
나렌드라 자다브 박사는 인도 중앙은행의 수석 경제보좌관 출신에 현재 명문 푸네 대학의 총장이다. 외신은 그를 '대통령감'으로 꼽는다. 그는 손만 닿아도 오염시킨다는 천출이다.
인도 카스트의 가장 낮은 계층은 수드라다. 그런데 수드라는 '사람'으로 인정받는 계급이다. 여기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들이 있다. 이들은 짐승보다도 못하다. 물이나 음식에 이들의 그림자만 닿아도 오염된다고 한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는 침을 흘리지 않도록 목에 침 받침을 걸어야 했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빗자루를 엉덩이에 걸고 다녀야 했다. 이들을 일컬어 촉수엄금(觸手嚴禁) 계층이라고 한다. 카스트 밖으로 내몰린 천민들인 아웃카스트(out-caste)는 인도 인구 16% 즉,1억6000만명이나 된다. (나렌드라 자다브,'신도 버린 사람들')
◆영겁의 윤회를 뛰어넘는 힘
이들이 수천년 동안 굴욕적인 삶을 감내한 것은 윤회를 믿기 때문이다. 즉,전생의 죄에 대한 벌이지만 성실하게 살면 다음 생에서는 보다 나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자다브 박사의 아버지가 마을 경찰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는 이유로 매질을 당하고 어머니와 함께 야반도주를 한 지 수십 년 뒤 그의 아들이 미국의 박사가 되고 국제기구의 자문관까지 되었으니,이 부자(父子)는 수십 번의 윤회를 통해서만 가능한 가파른 신분의 계단을 단번에 뛰어 오른 셈이다. 그의 조상들을 3500년 동안 짓누르던 굴레를 한 세대 만에 넘어설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부모는 자녀교육을 통해 운명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한 자다브 박사는 신분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하는 인도 천민들에게 교육은 일종의 종교라고 강조한다.
◆미친 듯이 공부하는 인도
인도의 엘리트 청년들은 미친 듯이 공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난히 다국적 기업의 우수 엔지니어와 CEO를 많이 배출한 인도공과대학(IIT)은 매년 18만명이나 응시하지만 2. 6%만이 입학할 수 있는 천국의 계단이다. IIT 입시에 떨어진 학생들이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기도 한다.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공동설립자인 비노드 코스라는 "박사학위를 위해 미국의 카네기멜론대학에 들어온 뒤 IIT에서 받은 교육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쉬워서 내가 너무 놀면서 학위를 하는 건 아닌지 반성했다"고 증언했다.
인도경제인연합회의 구르팔싱 부회장은 인도가 앞으로 30년 내에 중국 미국에 이어 일본을 제치고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어느 누구도 이 말을 허풍이라고 무시하지 못한다. 인도의 자신감은 미친 듯이 공부하는 이런 인력이 어느 나라보다 풍부하다는 사실에 있다. 한 회사가 갑자기 뛰어난 100명의 엔지니어가 필요하게 되었을 때 이를 공급할 수 있는 곳은 전 세계에 인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