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 장군의 영국군이 최후의 일전에 돌입했다. 같은 날 런던증권거래소에서는 무수한 투자자가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군이 이기면 투자한 영국 국채로 돈방석에 앉지만, 지면 깡통을 찰 수도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이 되자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졌다. 그러자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파견한 정보원이 브뤼셀로 달려가 배를 갈아타고 영국해협을 건넜다. 이튿날 새벽, 영국 포크스턴 해변에 도착해 직접 부두로 나온 네이선 로스차일드에게 편지 한 통을 전했다. 그는 봉투를 뜯어 훑어본 뒤 런던증권거래소로 달려갔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이윽고 네이선이 눈짓을 하자 그의 거래원들이 영국 국채를 팔아치웠다. 이 모습을 본 투자자들도 너도나도 팔자고 나섰다. 몇 시간 뒤 국채는 액면가의 5%도 안 되는 휴짓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이를 태연히 지켜보던 네이선이 눈짓을 하자, 거래원들이 반대로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웰링턴 장군의 특사가 승전보를 갖고 런던에 당도한 것은 이틀 뒤였다. 네이선은 그사이에 영국 국채로 20배의 차익을 챙겼다.
네이선의 일화는 프랑스 작가 발자크가 처음 언급한 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경제를 좌우한다는 음모론의 소재가 되었다.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그 배후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고, 가문의 총재산이 무려 6경원에 달하고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를 주무르며 비밀결사인 프리메이슨의 일원이라는 음모론이 지금도 공공연히 회자되고 있다.
골동품상에서 최초의 국제금융그룹으로
로스차일드는 ‘붉은 방패(rot schild)’란 뜻이며 독일어 이름의 영어식 발음이다. 독일계 유대인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18세기 전반까지 존재도 없는 가문이었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프랑크푸르트에서 골동품 가게와 대부업으로 성공한 메이어 암셸 로스차일드로부터였다. 메이어는 성실함과 신용으로 돈을 벌며 가문을 일으켜 부를 축적했다. 가장 결정적인 전기는 프로이센의 왕자 빌헬름공의 재산을 맡아 운용하면서부터다.
메이어의 진짜 재산은 다섯 아들이었다. 그들은 유럽 주요 도시들로 퍼져 은행을 세웠다. 5개 주요 도시에 설립된 로스차일드은행은 단일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역사상 최초의 다국적 국제금융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로스차일드 형제들은 각지의 정보원을 이용해 각국 정부와 금융시장 동향을 공유하며 부를 늘려갔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에는 라틴어로 ‘협력·성실·근면’이란 글귀와 화살 5개를 손에 쥔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화살처럼 빠르며 5형제가 하나로 뭉치면 결코 부러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형제들은 신속한 정보력과 단합된 힘으로 19세기 유럽의 돈줄을 거머쥐었다.
다이아몬드부터 와인, 미술품까지 손대다
19세기 중반이 되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각국의 금융은 물론 정치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큰아들 암셸이 키운 인물이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였고, 둘째 살로몬은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후원자였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국채, 주식 등 금융거래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었다. 19세기 ‘철도의 시대’가 열리자 유럽 철도사업의 자금줄이 되었고 광산업과 철강제련업에도 진출했다. 유럽 대륙의 산업혁명 과정에서 핵심 산업에 자금을 공급했다는 점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여를 무시할 수 없다. 미국 남북전쟁, 크림전쟁,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도 로스차일드 가문이 자금을 댔다. 1875년 영국의 디즈레일리 총리가 수에즈운하를 사들이는 데 400만파운드의 막대한 자금을 대 큰 이익을 안겼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시오니즘을 지원해 이스라엘 건국을 뒤에서 돕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