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언어와 사고를 감시·말살하는 디스토피아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복음은 당당하게 선언한다.
거무스름한 혼돈을 깨치고 세상의 분별은 말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 비의(秘意)를 둘러싼 분분한 해석은 일단 차치하고,요한복음의 유려한 첫 문장은 언어의 위력을 장엄하게 알린다.
신이 창조한 인간이든 인간이 만든 신이든 간에,복음의 첫 구절이 '언어'로 시작한다는 사실은 언어가 미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의 가공스러운 힘을 묘사한 작품을 들자면 조지 오웰의 「1984년」이 단연코 첫 손에 꼽힌다.
스탈린 체제의 소련 사회를 예리한 펜으로 희화화한 우화소설 「동물농장」으로 부동의 입지를 굳힌 정치소설가 조지 오웰-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은 지병 악화로 고생하면서 1948년 이 소설을 탈고하였다.
디스토피아 문학의 태두(泰斗)이자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의 제목은 소설 완성 연도의 숫자 둘이 뒤집어 붙여졌다.
그래서 「1984년」은 어느 특정 연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 있을지도 모르는 추상적 미래를 상징한다.
저자가 나날이 사그라지는 목숨을 붙들어가며 병상에서 집필한 「1984년」은 저자의 개인적 절망과 사회에 관한 불안이 땅거미처럼 어둑어둑하게 내려앉아 책을 읽노라면 목을 누르는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
작품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전쟁은 평화,자유는 예속,무지는 힘'이라는 모순된 슬로건이 사회를 지배하는 일당 독재의 전체주의 국가로서,전역에 설치된 텔레스크린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감시한다.
텔레스크린은 절대 끌 수 없는 모니터 장치로 사람들을 감시할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당의 명령을 일일이 하달하고 그 명령에 즉시 따르지 않으면 곧바로 경고를 보낸다.
완벽히 세뇌된 사람들은 감정 · 사고 · 행위 모두를 당에서 지시하는 대로 복종하며 살아간다.
이곳에서 개인의 주체적 이성과 자유로운 감정은 박멸되어야 할 대상,흔적 없이 제거해야 하는 얼룩일 뿐이다.
그리고 당국은 언어의 지배를 통해 사고의 숨통을 더욱 더 철두철미하게 졸라 들어간다.
기록은 끊임없이 날조되며,불필요한 언어들은 점차 소거되어 증발한다.
언어를 지배하는 당의 의지와 명령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날조되기에 오세아니아에서 '존재'의 의미는 극히 기만적이다.
당이 그때 그때 원하는 바에 따라 진리는 만들어지고 변형된다.
이러한 삼엄한 통제 가운데 소설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드는 용기를 내어 비밀 일기장을 몰래 구입하고 1984년 4월4일 텔레스크린의 사각지대에서 조심스럽게 펜을 든다.
체제에 반발하기 시작한 인물이 가장 먼저 시도한 행위가 '자신의 언어'로 생각을 직조하려는 것임은 큰 상징성을 지닌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윈스턴은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당황해한다.
일기장을 마주하고 윈스턴이 느끼는 한없는 무력감은 언어의 불능이 사고의 마비,존재의 무기력임을 뜻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