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상 나업은 딸 하나가 있었다. 재예(才藝)가 당대에 빼어났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헌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고치는 장사라 속여 승상 집 앞에 가서 “거울 고치시오!”라 외쳤다. 나 소저는 이 말을 듣고 거울을 꺼내 유모에게 주어 보냈다. 나 소저는 유모 뒤를 따라 바깥문 안쪽까지 나가 문틈으로 엿보았다. 장사가 소저의 얼굴을 언뜻 보고 반해, 손에 쥐었던 거울을 일부러 떨어뜨려 깨뜨렸다. (중략)
“거울이 이미 깨졌거늘 때려 무엇 하세요? 저를 노비로 삼아 거울값을 갚게 해 주세요.”
유모가 들어가 이를 승상께 아뢰니 허락하였다. 승상은 그의 이름을 거울을 깨뜨린 노비라는 뜻으로 파경노(破鏡奴)라 짓고 말 먹이는 일을 시켰다. 말들은 저절로 살쪄 여윈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는 천상의 선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말 먹일 꼴을 다투어 그에게 주었다. 이에 파경노는 말들을 풀어놓고 누워만 있었다. 날이 저물어 말들이 파경노가 누워 있는 곳에 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늘어서자 보는 자마다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중략)
이전에 승상은 동산에 꽃과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파경노에게 이를 기르게 했다. 이때부터 동산의 화초가 무성하며 조금도 시들지 않아, 봉황이 쌍쌍이 날아들어 꽃가지에 깃들었다.
[중략 부분 줄거리] 중국 황제는 신라 공격의 빌미를 얻고자, 신라 왕에게 석함을 보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알아내 시를 지어 올리라 명한다. 왕이 승상에게 과업을 넘기자 승상은 근심하고, 이를 안 나 소저는 아버지에게 파경노가 신인(神人)의 기운이 있다며 그를 추천한다.
승상이 말했다. “너는 어찌 쉽게 말하느냐? 만약 파경노가 할 수 있다면 나라의 이름난 선비 가운데 한 명도 시를 짓지 못해 이 석함을 나에게 맡겼겠느냐?” / 소저가 말했다.
“뱁새는 비록 작지만 큰 새매를 살린다 합니다. 그가 비록 노둔하나 큰 재주를 지니고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하략 부분 줄거리] 사위로 삼아 줄 때까지 시를 짓지 않겠다는 파경노가 비천하다 하여 그 요구를 승상이 거부하자, 나 소저가 아버지를 설득한다. 나 소저와 혼인한 파경노는 시를 지어 신라를 구한다.
- 작자 미상, 최고운전 -
장사가 소저의 얼굴을 언뜻 보고 반해 … 중국 황제는 신라 공격… 나 소저와 혼인한 파경노는 … 신라를 구한다.
영웅(hero)은 아무나 될 수가 없다. 일단 영웅이 되려면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나아가 역사적으로 위대하다는 소리를 듣는 성취, 즉 ‘업적(공적)’이 있어야 한다. 예컨대 나라를 구하는 일 정도는 되어야 위대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소설 중에 영웅을 주인공으로 한 ‘영웅 소설’이 있다. 이 소설도 그중에 하나로, 역시 위대한 업적이 드러나 있다. 즉 ‘중국 황제’의 ‘공격’에 대해 ‘신라를 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파경노’에게 영웅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그런데 대중은 영웅이 위대한 업적뿐만 아니라 개인적 성취 또한 잘해낼 것이라 믿는다. 생각해 보라. 큰일을 잘 하면서 작은 일은 못 한다? 더욱이 그 일이 대중의 욕망과 관련된 일이라면 영웅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다. 예컨대 사랑(love)이라는 개인적 욕망도 영웅은 잘 이뤄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영웅 소설에는 주인공의 사랑과 혼인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역시 이 소설에도 ‘장사(파경노)’가 ‘소저의 얼굴을 언뜻 보고 반해’ 승상 집에 들어가 결국에는 ‘나 소저와 혼인’을 한다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이렇게 위대한 업적과 개인적 성취가 있는 소설을 읽었다면 그것이 영웅 소설임을 떠올리고, 그 업적과 성취를 파악하려 노력해야 한다.
거울 고치는 장사라 속여 … 거울을 일부러 떨어뜨려 … 말들은 … 여윈 것이 … 없었다. … 화초가 무성하며 … 시들지 않아 … 선비 가운데 한 명도 시를 짓지 못해 … 파경노는 시를 지어
영웅은 비범해야 한다. 즉 보통 사람보다 수준이 뛰어나야 한다. 슬기로워야 하며 남다른 능력을 지녀야 한다. ‘파경노’는 ‘장사라 속’이고, ‘거울을 일부러 떨어뜨’리고 ‘나 소저’에게 접근하는 치밀함을 보임으로써 슬기롭게 행동한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 ‘말들은 … 여윈 것이 … 없’게 하고, ‘화초가 무성하며 … 시들지 않’게 한다. 그의 능력은 ‘시’를 짓는 것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선비 가운데 한 명도 시를 짓지 못’하는 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