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노인 : (화단 쪽을 가리키며) 저기 심어 놓은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는단 말이야! 아까도 들여다보니까 고추 모에서 꽃이 핀 지는 벌써 오래전인데 열매가 열리지 않잖아!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저 멋없는 것이 좌우로 탁 들어 막아서 햇볕을 가렸으니 어디 자라날 재간이 있어야지! 이러다간 땅에서 풀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게다! 말세야 말세!
이때 경재, 제복을 차려입고 책을 들고 나와서 신을 신다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는 깔깔대고 웃는다.
경재 : 원 아버지두……
최 노인 : 이눔아 뭐가 우스워?
경재 : 지금 세상에 남의 집 고추 밭을 넘어다보며 집을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 노인 : 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경재 : 옛날 일이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어요? 오늘은 오늘이지. (웅변 연사의 흉을 내며) 역사는 강처럼 쉴 새 없이 흐르고 인생은 뜬구름처럼 변화무쌍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이 역사적인 사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소한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에헴!
<중략>
최 노인 : 듣기 싫어! (화초밭으로 나오며) 이 집안에서는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어! 흔한 햇볕도 안 드는 집이 뭣이 된단 말이야! 뭣이 돼! (하며 화초밭을 함부로 작신작신 짓밟고 뽑아 헤친다.)
어머니 : (맨발로 뛰어내리며) 여보! 이게 무슨 짓이오! 그렇게 정성을 들여서 가꾼 것들을…… 원…… 당신도……
최 노인 : 내가 정성을 안 들인 게 뭐가 있어…… 나는 모든 일에 정성을 들였지만 안 되지 않아! 하나도 씨도 말야!
- 차범석, 불모지 -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는단 말이야! … 열매가 열리지 않잖아! … 저 멋없는 것이 좌우로 탁 들어 막아서 햇볕을 가렸으니
소설과 희곡의 가장 큰 차이는 서술자가 있느냐 없느냐에 있다. 소설과 달리 희곡에는 극 중 상황이나 인물의 심리, 사건 전개 양상 등을 설명하는 서술자가 없다. 현대 실험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상황이나 인물의 심리 등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소설의 서술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비중은 작다. 따라서 희곡은 인물의 대사가 매우 중요하다. ‘최 노인’의 첫 번째 대사를 소설에서는 많은 부분을 서술자의 설명으로 다음과 같이 처리할 것이다.
“저걸 보라고.”
최 노인이 가리키는 화단 쪽을 바라보았다. 심어 놓은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았다. 고추 모에서 꽃이 핀 지는 벌써 오래전인데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 이상하긴 이상했다.
“이게 다 저 멋없는 것 때문이라고.”
최 노인이 가리킨 것은 빌딩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좌우로 탁 들어 막혀서 화단에는 햇볕이 들어오지 않았다. 길게 드리운 차가운 그림자로 인해 앞으로는 땅에서 풀도 안 날 듯 싶었다.
“말세야, 말세!”
최 노인은 답답한 듯 혀를 찼다.
따라서 극 중 상황과 인물의 심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집중해야 한다.
이 작품에서 극 중 상황은 ‘좌우로 탁 들어 막아서 햇볕을 가’리는 ‘저 멋없는 것’(최 노인의 집 옆에 들어선 빌딩)에 의해 최 노인의 ‘화단’이 망가지는 상황이다. 이것은 단지 최 노인,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땅에서 풀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것이라는 대사에서 현대의 변화로 인해 사회 전체가 생명을 잃어가고 있는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최 노인의 대사를 통해 그의 심리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저 멋없는 것’이라는 대사에서 세상 변화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고, ‘말세야 말세!’라는 대사에서 주변 환경 변화에 대한 ‘최 노인’의 부정적 인식을 엿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