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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제시문 (가)~(마)는 과거사 청산방식에 대한 글입니다.
(가) ‘과거청산’이란 잘못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뜻한다. 엄격히 말해 과거 혹은 역사와 관련해 ‘청산’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기 어렵다. 역사적 사실인 과거사 자체를 사후(事後)에 마치 없었던 것처럼 하거나, 처벌과 보상 등의 방법으로 온전하게 교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반화되어 익숙해진 이 용어를 굳이 회피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용어를 좀 더 정확하게 사용하기 위해서 그 개념을 따져볼 필요는 있다.
과거청산의 의미는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과거 규명’이다. 이는 은폐·축소·왜곡 또는 금기시된 과거사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에 따라 적절한 조치를 시행함을 뜻한다. 다시 말해 과거 규명은 사건의 진상과 아울러 이에 대한 책임의 규명, 가해자의 처벌, 피해자의 보상과 복권, 명예 회복 등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사법적 또는 정치적 측면에서의 과거청산인 셈이다.
과거청산의 또 다른 의미는 ‘과거 성찰’이다. 과거 성찰은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의 차원을 넘어 그에 대한 비판과 반성, 애도와 치유의 노력을 의미한다. 과거 성찰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청산은 단순히 죄와 벌, 처벌 및 보상과 관련된 사법적 혹은 정치적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의식과 역사인식, 가치와 윤리, 문학과 예술의 문제이자 동시에 기념일, 기념물 등 공식, 비공식적 기억과 기념 문화의 문제이다. 아울러 과거 성찰의 측면에서 보면 과거 청산은 단지 가해자 혹은 피해자로서 과거사에 직접 연루된 특정 당사자 개인이나 일부 집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국가나 한 사회 구성원 전부, 나아가 후속 세대 전체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나)프랑스의 과거청산에서 ‘청산의 대상이 되는 과거’는 정확히 언제를 가리키는가? 1940~1944년의 ‘독일 강점기’이며, 더 구체적으로는 1940년 6월 22일 독일에 항복(공식적으로는 ‘휴전협정’체결)하면서 시작되어 1944년 8월 25일 파리 해방으로 끝난 4년간이다. 프랑스인들은 이 시기를 무엇보다도 ‘암울했던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수도 파리를 포함한 국토의 절반 이상(1942년 11월부터는 전체)이 독일 군대에 점령당했고, 약 3만 명의 민간인이 인질이나 레지스탕스 대원으로서 총살당했으며, 유대인, 레지스탕스 활동가, 공산주의자 등 13만9천 명이 독일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그 가운데 7만 8천 명이 학살당했다. 또한 65만 명의 노동자가 독일의 공장으로 끌려가 일해야 했다. (중략)
프랑스의 나치협력자(대독협력자) 청산은 1944년 6월 26일 드골이 전국에 ‘협력자 재판소’를 설치하고, 이어 8월 28일 국치죄를 저지른 자들의 사회활동을 금지할 목적으로 ‘시민 재판부’를 설치하면서 본격 시작됐다. 앞서 대독 항쟁 기간 중이나 해방과정에서도 약식 처형 형태의 협력자 처단은 더러 있었다. 이는 주로 레지스탕스 조직이 즉석에서 조직한 비상군법회의 형식의 재판인데 ‘거리의 정의’로 불린 이 재판에서 8000~1만 명이 처형되었다.
나치협력자 재판은 협력자 재판소, ‘비국민 판정’을 담당한 시민재판부, 그리고 비시정부*의 고위책임자 처벌을 목적으로 설치된 고등협력자재판소 등 세 군데서 진행됐다. 1944년 하반기부터 1948년 12월 31일까지 협력자 재판소에서 취급한 재판 건수는 총 5만5331건에 달했다. 이들 가운데 6763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 가운데 767명은 처형되었다. 또 무기징역 2702명, 유기징역 1만9637명, 금고 2만4927명 등 4만 명 가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3578명이 공민권 박탈을 당했다.
이와 별도로 시민재판부에서는 총 6만9282건을 취급하였는데 이 가운데 4만6645명이 공민권 박탈을 당했다. 또 고등협력자 재판소에서는 페탱 원수와 라발 총리 등 비시정부의 최고위층 인사 108명에 대한 재판을 벌여 사형 18명, 징역 및 금고형 22명, 시민권 박탈 15명 등의 판결을 내렸다. 사형선고를 받은 페탱은 종신형으로 감형되었으며, 라발과 민병대장 출신의 다르낭 등은 처형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숙청은 형사처벌 이외에 별도로 사회활동을 제한하거나 징계를 가하기도 했다. 우선 친독협력 문인들에게는 작품발표 금지령을 내렸으며, 나치에 협력한 공무원들에게는 징계를, 또 친비시 노조 지도자들은 노조에서 쫓겨났다. 또 독일군 점령 지역에서 15일 이상 발행된 신문사는 모두 ‘유죄’로 규정해 폐간시켰으며, 나치협력 언론사의 경영자를 처단하고 그 재산은 몰수하여 국유화했다. 또 비시정부에 복무했던 공무원 150만 명 가운데 2만2000~2만8000명이 행정 숙청의 대상이 돼 해임이나 파면 등 각종 징계를 받았다. 이 외에도 부당이득몰수위원회와 업종 간 연합숙청위원회가 부문별로 구성돼 친독 기업주들과 기업체 간부들을 상대로 경제적 숙청을 단행하기도 했다.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