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진화론적 자유주의 창시자 데이비드 흄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엔 이윤 추구에 초점이 맞춰진 경제체제가 확산됐다. 인간관계도 화폐를 매개로 한 계약을 통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업사회 확산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시장사회는 인류의 번영을 기약하는 체제라고 주장하면서 자유주의를 옹호한 인물이 영국의 도덕철학자 데이비드 흄이다. 학구적이었던 그를 늘 괴롭혔던 것은 ‘인류 번영에 적합한 사회체제는 무엇인가’라는 주제였다.
그런 거대담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 윤리 역사 등 여러 학문을 섭렵한 흄이 주목한 것은 인성론이다.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선 행위 주체인 인간의 성격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흄의 인성론의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지각활동과 경험을 통해 환경에 대한 지식을 얻고 이성적 판단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적으로 불완전해 늘 실수를 저지르는 존재라고도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은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동물이며 도덕적으로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탐욕은 모든 시대, 장소, 사람에게 작용하는 보편적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제도에 대한 생산적 논의는 인간의 이런 인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게 흄의 탁견이다. 인간이 지적으로 한계가 있기에 경험을 통한 다양한 학습이 필요한데, 학습 가능성은 제도에 좌우된다고 한다. 탐욕이 미치는 사회적 결과도 제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그의 견해가 흥미롭다. 같은 탐욕이라도 제도에 따라 사회적으로 좋은 또는 나쁜 결과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도가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한다. 흄이 주목한 것은 시장경제의 제도적 기초가 되는 정의다. 그에게 정의란 타인의 재산에 대한 존중과 계약의 준수 등 재산 및 계약과 관련돼 있다. 이는 타인의 재산에 대한 침해나 사기, 기만을 해서는 안된다며 사람들의 특정한 행동을 금지하는 행동규칙으로 표현된다. 이 같은 규칙을 위반하지 않는 한 누구나 자유롭게 경제활동을 할 수 있다.
이런 정의는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상호관계에서 자유롭게 학습할 제도적 조건이 된다. 정의의 틀 안에서는 인간이 탐욕적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이는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번영을 가져온다는 게 흄의 설명이다.
주목할 것은 상업사회에서 어떻게 학습과 번영이 가능한가의 문제다. 상업은 이윤 동기를 북돋아 근검절약 정신을 고취하고 낭비 습관을 억제한다는 게 흄의 경험적 인식이다. 그 결과가 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이라고 한다.
인간은 상업적 접촉을 통해 서로의 버릇과 관습을 모방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공유된 문화를 창출하는 능력도 상업사회만이 가능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시장경제는 상업을 통한 열린 소통으로 이성의 능력을 개선한다는 그의 인식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상업이 융성하면 과학 기술 문학 예술 등 갖가지 지식 혁신이 가능하고, 이는 지적 능력의 향상과 광범위한 문명과정을 촉진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자유사회는 지식에 대한 사랑과 호기심을 충족하고 위대한 정신을 배출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게 그의 통찰이다. 전제정부에서는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기에 그런 혁신이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인류 문명의 백미는 국경을 넘어서까지 상업을 확대한 국제무역이라고 흄은 지적했다. 자유무역은 한쪽엔 이익, 다른 쪽엔 손해를 주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에게 편익을 보장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무역은 상품 교환을 넘어 기술적 지식, 삶의 방식을 배울 소중한 기회도 마련한다고 설명한다.
흄은 “정의는 이성이나 본능의 산물이 아니라 진화의 선물”이라고 주장하며 진화사상을 개발했다. 인간사회의 유익한 제도들은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다는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지 않는 새로운 행동을 반복적으로 행할 경우 다른 사람도 그런 행동을 모방한다. 모방을 통해 그런 행동이 확산되고 그 결과 의도치 않게 재산을 존중하는 도덕이 형성된다는 설명이다.
새로운 행동의 등장과 모방을 통한 확산을 뜻하는 진화 과정을 통해 재산 계약과 관련된 법 도덕 언어 시장 분업 등의 행동규칙들이 형성된다는 게 흄의 진화론적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자생적으로 형성된 규칙을 지킨다면 그런 규칙을 강제로 집행할 정부는 불필요하다. 그러나 인간이란 타인의 재산을 침해하거나 약속을 어기는 게 유익하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연약한 동물이라는 게 흄의 인간관이다. 따라서 정부는 정의의 시스템을 유지해 재산과 자유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통치자가 적절히 법을 집행해 시민사회를 유지한다면 군주든, 공화정이든, 그 혼합이든 상관없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