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는 시장경제의 비중이 매우 낮았다. 건국 초기 국가정책에 의해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하여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농민들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장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 활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 생산에 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울에도 궁궐 앞 대로에 시전(市廛)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16세기 후반에 사헌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따르면, 1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시전을 이용한 횟수는 70여회에 불과하였다. 우선 녹봉과 관료에게 배정한 공노비와 호위병,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바치는 공물이 있어서 시전을 이용할 필요가 적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물이었다. 유희춘은 66개월간 학연이나 혈연관계가 있거나 자신의 추천으로 지방관으로 나간 관료들로부터 무려 2796회, 한 달에 42회꼴로 선물을 받았다. 쌀과 같은 곡물부터 시작하여 면포, 부채, 종이, 붓, 먹과 같은 문방구, 꿩, 생선, 전복, 소금, 감, 유자, 감자, 생강, 마늘, 인삼, 꿀과 같은 수산물, 과일, 약재는 물론이고 장작과 숯과 같은 땔감까지도 선물로 확보하였다. 공물과 선물로 물자를 확보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전을 거의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시장경제 점차 발전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시장경제의 비중은 높아진다. 전쟁의 충격으로 농촌을 떠난 인구가 많아졌으며, 1608년 이후 점차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되어 국가에 집중된 미곡이 대량으로 공인을 통해 방출됨으로써 상업 발달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1678년에 상평통보가 발행되어 전국적으로 통용되어 거래를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앙법의 보급으로 농업생산성이 증가해 잉여생산물의 공급이 늘어난 반면 소농경영의 성장과 노비제의 쇠퇴로 수요가 늘어난 것도 시장 경제의 발전을 뒷받침하였다.
우선 농촌의 장시(場市)가 크게 증가하였다. 1470년경에 흉년이 들었을 때 전라도 무안 등지에서 농민들이 성문 앞에서 필요한 것을 서로 교환하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가 되면 농촌 장시의 숫자가 전국에 1000개를 넘게 되었으며 5일마다 장이 서는 5일장 체제가 갖추어졌다. 장날이 서로 연계되어 농민들이 하루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는 장이 주변 지역에 거의 매일 열리게 되었으며 이런 농촌 장시 망을 무대로 보부상(褓負商)이 활동하였다. 장시 숫자는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에 1062개였는데 1911년의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도 1084개로 집계되어 장기간 그대로 유지되었다. 숫자는 그대로였지만 계층 분화가 생겨서 19세기 초에는 15개의 대(大) 장시가 성립해 있었다. 대 장시는 대개 감영과 포구가 있는 곳에서 열렸다. 특히 포구는 농산물과 수산물이 교역되고 원거리의 물산이 모여서 거래되는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최종적으로 물산이 집중되는 곳은 서울이었다.
한강 포구 경강상인 쌀값 좌우하기도
포구에서는 배를 가지고 영업하는 선상(船商)과 선상이 가져온 물건을 팔아주는 객주가 출현하였다. 객주는 ‘객상의 주인’(客商之主人) 곧 객지에서 온 상인의 일을 맡아서 대신 처리해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위탁 판매의 대가로 판매액의 1/10을 구문(口文)으로 받았는데, 이외에도 숙박, 창고, 금융 등의 여러 가지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포구 중에는 서울에 인접한 경강, 지금의 한강의 포구가 가장 번성하였으며 경강에서 활동하는 선상과 객주를 지칭하는 경강상인의 세력이 가장 컸다. 경강에는 19세기 초에 “각지에서 생선이나 미곡을 싣고 모여드는 상선이 해마다 1만 척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비변사등록』 순조 17년). 경강상인은 서울 주민들의 일상 소비에 필수적인 쌀, 생선, 소금, 땔나무 등을 취급하였는데, 쌀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취급하는 물량이 많아지자 서울의 쌀값을 좌우할 정도가 되었으며, 1833년에는 경강객주가 시전과 결탁하여 쌀을 매점매석하여 쌀값 폭등으로 주민들이 시전에 불을 지르는 ‘쌀폭동’까지 일어났다.
상설시장으로는 서울 시전이 대표적
상설시장은 대도시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서울의 시전이었다. 시전은 20만 서울 인구의 일상에 필요한 재화를 공급하였지만 다른 중요한 기능은 왕실과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공급하고 궁궐 수리와 과거장 설치 등과 같은 각종 국역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 반대급부로 서울 도성에서 10리까지 시전이 취급하는 물건을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권한인 ‘금난전권’(禁難廛權)이 부여되었다. 금난전권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부터였는데, 시전이 아닌 상인들의 ‘난전’이 시전의 영업을 위협하였기 때문이었다.


